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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의 시시각각] ‘음모 없는 음모론’이 가장 무섭다

중앙일보

2026.05.31 08:20 2026.05.31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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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탈리아의 세계적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푸코의 진자』는 음모론에 관한 이야기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세 명의 지식인은 장난삼아 중세 성전기사단의 ‘비밀’이 존재한다는 가짜 시나리오를 만들어낸다. 왕의 탄압으로 해체된 기사단이 지구 에너지의 비밀을 쥐고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수백 년 동안 세계를 배후에서 움직여 왔다는 스토리다. 이들은 역사책과 고문서, 숫자와 기호를 그럴듯하게 엮어 거대한 음모론을 완성한다. 처음에는 단순한 지적 유희였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진짜로 믿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주인공들 자신도 스스로 만든 이야기에 빠져들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광신자들이 몰려들어 비밀을 내놓으라며 주인공들을 위협하고, 결국 살인으로까지 이어진다. 허구가 현실을 잠식해버린 것이다.

스타벅스, 고의라기보다 실책성
무감각 비판과 개선 요구 좋지만
과잉 해석은 소모적 갈등만 키워

소설 속 장면 하나. 주인공은 비밀의 단서가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어떤 고문서 분석에 집착하지만, 그의 연인은 그 종이가 단지 중세 상인의 거래 명세서임을 밝혀내 주인공을 머쓱하게 만든다. 이들이 쫓는 거대한 비밀은 사실 별것 아닌 기호와 텍스트의 파편에 불과하다. 에코가 풍자한 것은 음모론 자체보다 인간의 과잉 해석 욕망이었다. 사람은 우연을 필연으로 읽고 싶어 한다. 무관한 사실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찾으려 한다. 평범한 상업 문서가 비밀 결사의 암호문이 되고, 의미 없는 숫자가 거대한 음모의 증거가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스타벅스코리아의 ‘5·18 탱크데이’ 논란을 보며 오래전 읽었던 이 소설을 떠올렸다.

지난달 26일 서울 시내 한 스타벅스 매장에 사과문이 붙어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6일 서울 시내 한 스타벅스 매장에 사과문이 붙어 있다. 연합뉴스

물론 기업의 무감각과 허술한 검증 시스템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여러 단계 결재를 거치는 동안 누구 하나 문제를 걸러내지 못했다. 정용진 회장의 과거 ‘멸콩놀이’의 잔상까지 겹쳐 논란이 커진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일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리스크 관리에 대해 묵직한 화두를 던졌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일부 과잉 해석은 별개의 문제다. 일각에서는 마케팅 문구에 등장한 숫자들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했다. 이벤트 오픈 시간인 ‘오전 10시’를 전남대 앞 첫 충돌 시간과 연결하고, ‘10% 할인’을 열흘간의 항쟁 삭제로, ‘21% 할인’을 5월 21일 계엄군 집단 발포의 소거로, 텀블러 용량 503㎖를 전직 대통령의 수인 번호로 해석하는 식이다. 이런 식이면 세상에 의심받지 않을 숫자가 없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20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22회 국무회의 겸 제9차 비상경제점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20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22회 국무회의 겸 제9차 비상경제점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정치권이 이 문제를 진영의 동력으로 삼으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대통령은 “저질 장사치의 비인간적 막장 행태” “인두겁을 쓰고서는 할 수 없는 일” 등 맹렬한 언어로 질타했다. 여당은 고의성 여부를 따지기도 전에 이 문제를 지방선거판의 쟁점으로 만들어버렸고, 역으로 국민의힘은 ‘극우 정당’ ‘역사 몰감각 정당’이라는 프레임을 자초하면서까지 스타벅스 옹호 게시물을 SNS에 올렸다.

비판과 의혹 제기는 당연하다. 문제는 검증보다 해석이 앞서고, 사실보다 서사가 힘을 얻는 순간이다. 그 순간 팩트는 상상력의 영역으로 밀려나고, 갈등은 소모전에 갇힌다. 역사 왜곡과 혐오 표현은 단호히 배격해야 하지만, 비판과 음모론의 경계가 흐려져서는 곤란하다. 둘이 뒤섞이는 순간, 비판은 설득력이 떨어지고, 음모론은 냉소의 대상이 된다.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인 만큼 단정은 이르다. 다만 현재까지 드러난 사실만 놓고 보면 이번 사태는 의도적 ‘공작’이라기보다 담당자의 무감각과 기업의 허술한 검증 시스템에서 비롯된 실책에 가까워 보인다. 물론 가볍게 넘길 일은 아니다. 반성과 재발 방지책이 따라야 한다. 하지만 단순한 숫자 하나하나에 음모를 대입하는 과잉 해석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에코는 소설 속 주인공의 입을 빌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비밀은 내용물이 없는 비밀”이라고 했다. 실체가 없기에 상상력과 확증편향이 그 빈 자리를 채운다. 음모 없는 음모론이 가장 위험한 법이다.





이현상([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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