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 호프만 덴마크 코펜하겐 대학 교수가 서울신라호텔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 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저는 조금 다른 ‘한국인’입니다. 입양되고 나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렸으니까요. 슬픈 일이죠. 그래서 제 뿌리를 인정해 준 삼성 호암상 수상이 너무나 뜻깊고 가슴 벅찹니다.”
제36회 삼성 호암상 의학상 수상자인 에바 호프만(51) 덴마크 코펜하겐대 교수는 인터뷰 도중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인간 난자의 염색체 이상이 10대 때 높았다가 20대 중반에 최저점을 찍고 다시 높아지는 ‘U자 곡선’을 따른다는 사실을 세계 최초로 발견했다. 여성의 난자 상태가 나이가 들수록 무조건 나빠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개선되는 구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하지만 화려한 학문적 성취 이면에는 한국계 입양아라는 가슴 아픈 과거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난달 31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그를 만나 발자취를 들어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
‘난자 노화’ 오랜 정설을 깨다
에바 호프만 덴마크 코펜하겐 대학 교수가 서울신라호텔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 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Q : 어렸을 때부터 유전학에 관심이 많았나.
A : 비록 입양을 갔지만 덴마크 가족은 훌륭한 울타리였다. 덴마크 시골 동네에서 살았는데 스포츠 환경이 잘 갖춰져 있어 수영팀에서 활동했다. 청소년기 땐 수영으로 올림픽에 나가고 싶었다. 그러다 고등학생 때 생물학 선생님으로부터 유전학을 처음 배웠고, 이 학문에 대해 깊은 경외감을 느꼈다.
Q : ‘U자 곡선’ 연구 결과가 학계에 큰 충격을 줬다.
A : 학계에선 여성이 평생 쓸 난자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나이가 들수록 난자 상태가 나빠진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러나 2~46세에 이르는 3000여 개의 인간 난자를 직접 분석해 보니 15세 이하에서도 난자의 절반가량이 염색체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사이(16~26세) 연령대에선 오히려 염색체 이상 비율이 낮아지는 U자 곡선 형태를 보였다.
Q : 난임 부부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A : 현재 주된 고민은 ‘무엇이 이 곡선(염색체 이상)을 완만하게 만드는가?’ 더 나아가 ‘이 곡선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다. 향후 가임기 여성의 유산 확률을 낮추고, 30·40대 여성들의 선천성 질환 발생률을 줄일 수 있게 되길 바란다.
Q : 20년간 연구 기간 중 벽에 부딪혔던 때가 있나.
A : 두 가지 난관이 있었다. 원래 효모(yeast)를 연구했는데 인간 난자를 직접 연구하는 방향으로 가게 됐다. 정말 어려운 도전이었다. 임상의들과 협력해 난자 채취 시스템을 구축해야 했고, 인내심도 필요했다. 주변의 지원과 훌륭한 팀워크가 모여 성공할 수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커리어 측면이었는데 아이를 낳아 양육하며 힘들었던 시기다.(웃음)
호프만 교수는 현재 14살, 16살 두 아들을 두고 있다. 그는 “이젠 아이들이 많이 커 집에 잘 있다. 학교 시험 기간과 겹쳐 한국에 같이 오지 못 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기초연구의 어려움도 털어놨다. 세계 각국의 공통적인 문제로 “학문의 자유가 위협받고 있는 현실”을 지적했다. 그는 “기초 연구는 막대한 비용이 드는데, 투자나 펀딩이 양자 기술 등 특정 분야에 편중되는 경향이 짙다. 연구자가 스스로 주제를 선택할 자유가 제한받고 있는 점이 안타깝다”고 했다.
━
고아로 위조된 30년…진실 추적 끝에 만난 어머니
눈부신 학문적 성취 이면에는 생후 2.5개월 만에 덴마크로 떠나야 했던 한국계 입양아로서의 아픈 사연이 있었다. 당시 생계난에 시달리던 친가족은 “아이의 소식을 계속 전해 줄 것이고 아이가 크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입양 기관의 말에 아이를 낯선 땅으로 보냈다. 하지만 그 말은 거짓이었고, 입양 기관이 서류를 ‘고아’로 위조해 덴마크로 보내진 것이었다.
Q : 어떻게 한국 가족과 만나게 됐나.
A : 32살이던 2006년 덴마크 입양 기관에서 연락이 왔다. 처음엔 대상을 착각한 줄 알았다. 알고 보니 한국 가족들은 30년간 매년 한국 입양 기관을 찾아내 소식을 물었지만, 답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심지어 이중 서류가 작성돼 내가 네덜란드로 입양된 줄 알고 있었다. 그러다 (한국) 친오빠의 대학 선배가 해당 입양기관에 직원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은폐됐던 진실이 풀렸다.
Q : 한국 가족과의 첫 만남은 어땠나.
A : 2007년에 만났다. 한국 부모님이 큰 언니와 함께 미국 알래스카로 이민을 가 있어서 남편과 그쪽으로 갔다. 가족들은 정말 따뜻했다. 열흘 정도 머물렀는데 매번 ‘서양식’과 ‘한국식’ 식단을 따로 마련해줬다. 한복도 선물로 주고 어머니가 직접 김밥을 해주고 김치 레시피도 알려줬다. 부모님은 기쁘면서도 무척 슬퍼하셨다.
안타깝게도 어머니는 호프만 교수와 재회하고 한 달 뒤 세상을 떠났다. 호프만 교수는 “언니 말로는 행복하게 돌아가셨다고 했다. 대부분의 입양인은 평생 가족을 찾지도 못하는데 어머니를 뵐 수 있어 다행이고 기뻤다”고 말했다.
여전히 한국인 가족과 왕래하며 지낸다는 호프만 교수는 이번 수상의 영광을 17만 명의 다른 한국계 입양인에게 돌렸다. 그는 “이번 수상이 한국 사회에서 ‘입양인’이라는 존재가 조금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수용되고 있다는 뜻이기를 바란다”며 “‘당신들은 나쁜 부모다’라는 비난을 들으며 커다란 수치심과 비밀을 가슴에 품고 살아오셨을 한국의 가족들에게도 위로와 희망이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