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병원 입원실의 남녀 구별 의무를 폐지하려던 방침을 결국 철회했다. 관련 규정 개정을 입법예고한 지 나흘 만이다. 환자 안전과 사생활 보호, 성인지 감수성 측면에서 민감한 사안을 충분한 검토 없이 추진했다가 반대 여론이 커지자 입장을 번복하면서 혼란을 자초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보건복지부는 지난달 31일 오후 10시 12분 보도설명자료를 통해 “남녀 입원실 구별 규정 폐지에 대한 국민 의견을 충분히 반영해 의료법 시행규칙 개정안을 현행대로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오후 4시쯤 법제처 국민참여입법센터에 “남녀 혼실은 절대로 있어선 안 될 일”이라며 반대 의견이 빗발치고 있다는 본지 보도가 나온 지 약 6시간 만에 기존 방침을 철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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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원실 남녀 구별 폐지하려다 역풍
31일 오후 10시 12분 언론에 배포한 복지부의 보도설명자료. "국민 의견을 반영해 현행대로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사진 보건복지부
이에 따라 입원실은 기존처럼 남녀를 구별해 운영하도록 하고, 중환자실이나 부부·가족 등이 2인실을 사용하는 경우에만 남녀가 한 병실을 쓸 수 있도록 단서 규정을 마련하기로 했다. 성별에 따른 병상 배정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중환자실이나 공동 간병이 필요한 부부 등이 2인실을 함께 사용할 때는 예외를 인정해 남녀가 같은 병실에 입원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다.
이번 논란은 복지부가 지난달 27일 남녀 구별 의무를 규정한 입원실 운영 기준을 삭제하는 내용의 의료법 시행규칙 개정령안을 입법예고하면서 시작됐다. 현행 의료법 시행규칙 제35조의2는 ‘입원실은 남·여 별로 구별해 운영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개정안은 해당 조항을 삭제하는 내용을 담았다. 지난해 4월 “요양병원 입원 부부가 같은 병실을 사용하지 못해 불편하다”는 민원이 들어와 이를 개선하기 위한 조치라고 복지부는 설명했다.
입법예고 직후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여성 환자들이 성범죄에 노출될 위험이 커질 것”이라며 성범죄와 사생활 침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잇따랐다. 서울 한 대학병원 관계자는 “다인실 비중이 높은 국내 의료 환경을 고려하면 환자들이 편안하게 치료받기 어려운 환경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29일 오후 4시 43분 나온 복지부의 보도설명자료. 복지부는 "충분한 의견 수렴을 통해 보완하겠다"고 밝혔다. 사진 보건복지부
여론이 악화하자 복지부는 입법예고 이틀 뒤인 지난달 29일 보도설명자료를 통해 “무분별한 남녀 입원실 운용은 제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입원실 남녀 구별 의무는 폐지하지만 부부·가족의 2인실 사용, 중환자실, 어린이병원 병실 등은 예외적으로 남녀가 같은 병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복지부 지침으로 안내하겠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해명에도 국민참여입법센터와 온라인에서는 “상위 규정이 삭제되면 남녀 혼실을 제재할 근거가 사라진다” “남녀 구별은 강제해야 한다. 지침은 안 지키면 그만” 등의 반대 의견이 이어졌다. 정부는 남녀 구별 규정을 없애고 예외 기준을 두려 했지만, 여론은 규정은 유지한 채 예외를 인정해야 한다고 맞선 셈이다. 결국 복지부는 한밤중 갑작스럽게 철회를 발표했다.
불과 닷새 동안 ‘입법예고→보완책 제시→최종 철회’로 정책 방향이 오락가락하면서 사회적 혼란만 커졌다. 이번 개정안은 6개 항목을 한꺼번에 손질하는 내용으로 입법예고됐는데, 시행규칙 조문별 제·개정 이유서에는 입원실 남녀 구별 규정 삭제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포함되지 않았다. 복지부 관계자는 “당시에는 해당 내용을 중요한 개정사항으로 보지 않았다. 논란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정부가 면밀한 검토나 의견 수렴 없이 제도 개편을 추진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제도 개선으로 혜택을 보는 사람뿐 아니라 피해를 겪을 수 있는 국민에 대한 검토도 함께 이뤄졌어야 했다”며 “의료기관은 사실상 모든 국민이 이용하는 시설인데도 충분한 영향 평가나 의견 수렴 절차가 없었다는 점에서 행정이 수십 년 전으로 퇴보한 것과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허 조사관은 “정책 추진과 철회 과정에 투입된 인력과 자원은 물론 국민이 겪은 혼란과 피로감까지 고려하면 행정력만 낭비한 셈”이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