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에 드디어 가야만 하는 상황이 왔다.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고 미루던 치과 의자에 앉아 나는 후회한다. 고로 존재한다. 치료가 시작되자 나는 치과에서의 시간이야말로 활줄처럼 팽팽하게 흐르는 진짜 시간이었다는 걸 기억해낸다. 드릴로 치아를 가는 소리처럼 기분 나쁜 소리가 있을까? 하지만 이내 그 소리는 참을만한 익숙한 소리가 된다.
챗GPT에 치과 경험 쓰게 했더니
내 글보다 못할 게 없어 힘 빠져
마취 깬 후 통증이 인간만의 영역
[그림 황주리]
아니 그 소리야말로 살아있음을 강렬하게 느끼게 한다. 마취 덕분에 아프지 않아도 여전히 거슬리는 소리를 들으며 놀랍게도 얕은 잠에 빠지기도 한다. 맨 처음 자동차를 타고 세차를 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하나도 젖지 않고 바닷속의 해초들 사이를 미끄러져 나가는 듯한, 마치 세차장에 들어간 자동차가 된 기분이다. 그러다가 엉뚱하게 어릴 적 아버지를 잃은 가난한 어머니의 슬픈 추억이 겹쳐온다. 이가 아파서 치과에 갔다가 일본인 의사가 돈 받은 만큼만 뽑아줄 수 있다며 마취를 안 하고 생니를 뽑았던 기억이 내 것처럼 떠오른다.
언젠가 먼 여행길에 동행했던 어느 치과의사의 솔직한 말도 생각난다. “손재주 없는 치과의사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습니다. 정말 환자들에게 미안했어요.” 그때 나는 그 없는 손재주로 엉성하게 치아를 해 넣어준 환자들이 좀비처럼 창백한 얼굴로 그를 쫓아가는 풍경을 상상했다. 기억 속의 손재주 없는 의사 선생이 이어 말한다. “그런데 하면 할수록 제 손재주도 늘더라고요. 지금은 제법 할만합니다. 다행이지요. 하늘에 감사한답니다.”
맞는 말이라 속으로 박수를 쳤던 기억도 난다. 모든 일은 하면 할수록 는다. 운전도, 요리도, 글쓰기도, 그림 그리기도. 늘지도 진화하지도 않는 건 바로 인간의 양심이다. 잘못한 게 많은 사람일수록 사과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뻔뻔하게 거꾸로 남에게 뒤집어씌우기 일쑤다. 그에 비해 잘못한 것도 별로 없는 사람이 다 제 잘못이라고 머리를 조아리는 풍경을 종종 목격한다. 나는 미안할 때 미안하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는 사람을 지인의 명단에서 빼기를 좋아한다. 2차 대전 때 소위 난쟁이라 불리던 왜소증 환자들을 생체 실험한 나치 의사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생각난다. 전쟁이 끝나고 그 의사가 전범으로 기소되었을 때,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키 작은 장애인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그 의사 덕분에 춥고 더러운 수용소에서 나와 깨끗한 침대에서 쉬며 맛있는 걸 먹을 수 있었다고. 그 시절 그들은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으며, 그 의사가 생체실험을 심하게 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그 장면을 보며 나는 인간이란 얼마나 복잡한 마음들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치료할 게 많아 잠시 쉬는 사이 챗GPT에게 치과 경험에 관한 글을 써보라 하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가끔은 작은 아픔을 견디는 일도 하루를 살아가는 작은 용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아를 고치는 일은 삶의 작은 균열을 수선하는 일과 닮아있다.” 내친김에 황주리 작가 스타일로 치과 경험에 관해 써 보라 하니 이런 글이 돌아왔다. “치과에서 나는 환자라기보다 오래된 그림 한 점 같았다. 시간이 덧칠하고 벗겨지고 다시 덧칠한 그림, 내 입속의 세계는 생각보다 복잡했다. 금으로 메운 자리, 다시 메운 자리, 오래 버틴 자리, 마치 내 인생의 지도 같았다.”
갑자기 힘이 빠진다. 챗GPT보다 내가 쓴 글이 나을 게 뭔가? 이런 세상에 문학은, 예술은, 아니 삶은 어떤 의미를 지녀야 하는가? 요즘 말로만 듣던 로봇 물걸레 청소기의 성능에 놀라는 중이다. 진공 청소하고 물걸레로 닦고 걸레를 세척해 말려놓는 청소기. 먼지 하나 없이 윤이 나는 마룻바닥을 바라보며 나는 로봇이 가족 같은 생각이 든다. 사람보다 훌륭한 도우미·의사·정치인·예술가. 로봇들이 세상일 다 맡아 하고 사람은 구경만 하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점점 결함이 없어지는 기계 덕분에 변치 않고 결함투성이인 인간끼리의 소통은, 더구나 사랑은 더 어려워지지 않을까? 고백도 사과도 다 무의미할지 모른다.
지금은 아프지 않아도 마취가 풀리면 아플 거라는 간호사의 말을 들으며 치과를 나선다. 아픔마저도 인간적인 단어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