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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지역 이슈는 뒷전인 중앙당의 공천 독식 끝내야

중앙일보

2026.06.01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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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지방자치의 의미를 살리려면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역사를 전공으로 하면서 가장 전형적인 스토리는, 원인에서부터 결과와 그 이후의 영향까지 기승전결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정말 흥미로운 역사 연구는 합리적 설명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건을 분석할 때 나타난다. 현대사에서 예상할 수 없었던 결과를 가져온 사건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선거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였다.

탄핵 역풍 속 한나라 선전 2004년 총선 등 선거 결과 합리적 설명 어려워
여당 지지율 높았는데도 참패한 2016년 총선 등이 부정선거론 기원
여론조사 결과 악용 우려한 유권자 응답 꺼려, 출구조사 참사로 나타나
이번 지방선거 조사 따라 편차 심해, 전국 선거의 총체적 문제 드러내

진보정당의 기원이 된 보수정당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보통선거인 1948년 5·10총선 투표 현장. [중앙포토]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보통선거인 1948년 5·10총선 투표 현장. [중앙포토]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유일한 정당으로 참여했던 한국민주당은 전체 200석 중 29석밖에 확보하지 못했다. 아직 정당 시스템이 자리 잡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예상 밖으로 저조한 결과를 얻은 한국민주당은 야당으로 전락했다. 초대 내각 가운데 재무부 장관만 한국민주당 출신에 돌아갔다. 그 결과 한국 보수정당의 기원인 한국민주당은 1954년 총선 이후 현 진보정부의 여당인 민주당의 출발점이 되었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장면과 신익희는 “못 살겠다 갈아 보자”는 구호를 내걸고 국민의 심판을 구했다. [중앙포토]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장면과 신익희는 “못 살겠다 갈아 보자”는 구호를 내걸고 국민의 심판을 구했다. [중앙포토]

자유당은 1958년 총선 승리에 매진했다. 1954년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초대 대통령의 임기를 종신으로 바꾸었지만, 대통령이 고령인 데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유사시 대통령직을 이어갈 부통령에 야당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되었다. 자유당에는 1958년 총선의 승리와 그 기세를 몰아 1960년 부통령 선거에서 승리가 필요했다.

총선을 앞두고 진보당 사건이 발생했다. 1956년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진보당이 총선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자유당은 압도적으로 승리하지 못했다. 야당이 전체의 34%인 79석을 차지했다. 개헌을 저지할 수 있는 의석수였다. 게다가 자유당은 서울에서 1석, 부산·경남에서는 1석도 얻지 못했다. 이 결과는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유신의 시작과 끝이 된 총선
1971년 대선 때 김대중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선거유세 중 연설하고 있다. [중앙포토]

1971년 대선 때 김대중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선거유세 중 연설하고 있다. [중앙포토]

1971년과 1978년 총선은 각각 유신체제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의외의 결과를 가져왔다. 71년 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은 40%가 넘는 의석을 확보했고, 득표율은 여당인 민주공화당과 4%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서울과 부산에서 27석 중 24석을 차지했다. 유신 하에서의 1978년 선거에서 국민은 야당에 64석을 몰아주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선출하는 77명을 제외하면, 전체의 반 정도를 야당이 차지했다. 득표율은 신민당이 민주공화당을 앞섰다. 한 선거구에서 2인을 뽑는 중선거구제도가 아니었다면, 여당은 더 큰 패배를 했을 것이다. 78년 총선은 이후 10·26 사건과 유신체제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시발점이 되었다.

1985년 총선은 신군부의 서슬 퍼런 권력이 작동하던 때였다. 그러나 집권 여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되어 있던 전국구가 아니었으면, 여당이 과반수를 얻지 못했을 정도로 야당의 바람이 불었다. 투표율은 84.6%로 1958년 이후 가장 높았다. 중선거구가 없었다면, 대도시에서 여당은 한 석도 못 건졌을 것이다.

민주화 이후에도 예상은 비껴갔다
민주화 이전의 선거는 여론조사가 없었기 때문에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강력한 권위주의 정부의 관권선거는 정부·여당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고 있었다. 중앙정보부나 안전기획부 같은 정보기구가 여론조사에 동원되었고, 대부분의 언론은 정부 여당의 압승을 예상했다. 그러나 예측을 벗어났다. 국민보다는 권위주의 정부를 위해 일했던 정보기관들은 객관적인 상황판단도, 권력에 대해 직언도 할 수 없었다.

민주화 이후 여론조사가 이루어지면서 대부분의 선거에서 예측이 가능하게 되었다. 1995년 이후에는 전국 동시 지방선거(지선)가 이루어지면서, 전국 단위 선거의 수가 많아졌지만, 여론 조사를 통해서 국민의 의사가 선거를 통해 합리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런데도 민주화 이후 선거에서 예상 밖의 결과를 가져온 경우도 있었다.

그 대표적 사례가 2016년의 총선이었다. 여론 조사 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는 인식이 처음 나타나기도 했던 선거였다. 2016년 선거는 특별한 이슈가 없다면 여당이 반수 이상의 승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선거였다.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서 선거 이틀 전까지 여당 새누리당이 37%, 야당 더불어민주당이 20%, 야당에서 분당한 국민의당이 17%의 지지를 얻고 있다고 조사되었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50%에 육박하고 있었다. 논란이 되었던 중국의 70주년 전승기념일에 참석하여 천안문 망루에 올라간 후 박근혜 정부 지지율은 50%를 넘겼고, 여당인 새누리당의 지지율도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2배에 달했다. 세월호 사건과 인사 검증 실패, 그리고 메르스에 대한 늦은 대응으로 지지율이 하락하기도 했지만, 40% 이상의 견고한 지지율을 보였다.

야당은 위기였다. 2014년 12월 통합진보당이 해산되었다. 여기에 더해 야당이 분열하면서 국민의당이 창당되었다. 국민의당은 야당의 텃밭인 호남에서 약진했다. 집권당은 개헌선까지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다. 새누리당은 종합부동산세, 행정수도 이전 문제 등으로 2006년 지선, 2007년 대선, 그리고 2008년 총선에서 모두 승리한 상황이었다.

결과는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왔다. 더불어민주당이 123석으로 제1당이 되었고, 새누리당이 122석, 국민의당이 38석을 얻었다. 정의당의 6석을 포함하여 야당 의석은 과반이 넘는 167석에 달했다. 개헌은 아니더라도 어떤 법도 통과시킬 수 있는 의석수였고,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라는 거대 여당이 출범한 이후 야당의 최대 승리였다.

2004년과 2010년의 의외 결과
예상을 뒤엎는 결과는 2016년 이전에도 있었다. 2004년 총선도 예상외의 결과였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의 역풍으로 열린우리당의 압승이 예상되었지만, 결과는 야당인 한나라당의 선전이었다. 선거 출구 조사에서 이변이 속출했다. 한 방송사의 출구 조사 결과에서 서울 8곳, 인천 3곳, 경기도 4곳, 강원도 2곳, 경상남도 2곳의 결과가 바뀌었다. 모두 열린우리당의 승리가 예측되었던 곳이지만, 한나라당이 승리했다.

2010년 지선에서도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여론조사에서 오세훈이 최소 11.9%P에서 최대 22.9%P차이로 크게 앞서는 것으로 보도되었지만, 실제 결과는 달랐다. 오세훈 후보가 승리하기는 했지만, 그 차이는 0.6%P에 불과했다. 선거 결과가 바뀌지는 않았지만, 여론 조사 결과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인천·강원에서는 야당이 20%P 뒤지는 것으로 나왔는데, 모두 야당이 당선되었다.

이상과 같이 예상을 뒤엎는 결과는 지금도 일부에서 제기하고 있는 사전투표를 포함한 부정선거 주장의 기원이 되었다. 보다 많은 국민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기 위하여 2005년부터 부재자 투표 대상이 늘었고, 2014년 지선과 2016년 총선에서 지금과 같은 사전투표제도가 처음으로 실시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출구조사 왜곡 사건?
2016년 여론조사와 선거결과 사이의 차이는 웃지 못할 상황을 가져오기도 했다. 문서로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일부 방송국에서 출구 조사 결과를 조금이라도 더 여당에 유리하게 발표하라는 ‘당국의 압력’이 있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 결과 출구 조사와 선거 결과 사이에 더 큰 폭의 차이가 나타나기도 했다. 방송사들의 출구 조사 결과 최대 136석에서 147석의 여당 의석을 예상했지만, 실제 결과는 105석으로 야당의 135석에 미치지 못했다.

이렇게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왔던 원인은 여론조사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론 조사 결과가 정치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에 대한 유권자들의 우려가 여론조사의 응답률을 떨어뜨렸다. 아울러 여론조사 기관들이 정치적 의도를 갖고 여론조사를 왜곡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유권자들의 의도를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선거 결과가 여론조사와는 다르게 나올 수는 있지만, 유권자의 표심은 정확히 반영한다는 점이다. 2016년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문제는 지지율이 아니라 공천 과정이었다. 아마도 정치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국민이라면 ‘비박’과 ‘친박’을 넘어선 소위 ‘찐박’이라는 용어를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당 대표가 ‘옥새’를 갖고 도망간 사건까지. 그리고 그 결과는 헌정사상 첫 탄핵으로 이어졌다.

지방자치를 살리기 위한 공천 과정 개혁
공천과정과 후보자의 자질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국 정치의 공천은 지나치게 중앙에 집중되어 있다. 국회의원은 물론 지방자치단체가 모두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공천 과정에서 각 지역의 여론조사가 도입되었지만, 최종 공천권은 중앙당이 갖고 있다. 그렇기에 지방에서의 활동이나 전문성이 큰 변수가 되지 않는다.

이 문제는 특히 지선에서 더 중요하다. 지선의 주요 이슈는 각 지역의 발전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중앙정치에 의해 좌우된다. 그러니 지선의 투표율은 총선에 비해 낮을 수밖에 없다. 누가 되든 지역발전에 큰 변화가 없을 거라고 보기 때문이다. 국민 한 사람이 7번 이상을 투표해야 하는 상황에서 후보에 대해 정확히 알기 어렵다. 지방자치의 본 의미를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현재의 공천제도는 바뀌어야 한다.

올해 지선은 2010년 이래 처음으로 여론조사가 출렁이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의 전국 단위 선거가 가진 문제를 총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선 무용론이 나오기 전에 공천제도와 후보자의 자질 개선을 통해 현대 민주주의 체제에서 지방자치의 의미가 살아날 수 있도록 제도적 개혁이 있어야 할 것이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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