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가정의 달은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시기다. 일상 속에서도 가족의 역할은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은행 앱 화면을 함께 보며 상품 내용을 대신 읽어주거나, 공공서비스 신청 과정에서 어떤 항목을 선택해야 하는지 설명해주는 장면은 이제 낯설지 않다. 병원 예약이나 행정 서비스 이용 과정에서도 가족이 내용을 해석하고 절차를 함께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모습은 단순한 도움을 넘어, 디지털 서비스가 실제로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에 가깝다.
[AI 생성, 가족 이미지]
-혼자서 완결하기 어려운 서비스 구조 디지털 서비스는 빠르게 확산됐지만, 모든 이용자가 동일한 방식으로 이를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금융·공공서비스를 중심으로 비대면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서비스 이용 과정은 점점 더 ‘스스로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전제로 설계되고 있다. 현재 공공서비스와 금융 서비스는 일정 수준 이상의 이해와 판단을 요구한다. 절차는 단계별로 이어지지만, 각 과정에 대한 충분한 설명 없이 선택을 요청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용자는 내용을 충분히 파악하기보다 화면이 요구하는 흐름을 따라가게 되는 상황을 경험하기도 한다.
정보 제공 방식 역시 한계가 있다. 안내는 대부분 긴 문장과 전문 용어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핵심 내용을 빠르게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금융 서비스에서는 금리·수수료·조건과 같은 요소가 복합적으로 제시되고, 공공서비스에서는 행정 용어와 절차가 이해를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점은 현재의 정보 제공 방식이 일부 이용자의 언어 환경과 정보 접근 방식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용을 읽는 것과 실제로 이해하는 것 사이에는 여전히 차이가 존재하지만,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설명 체계는 충분히 마련돼 있지 않다.
국립국어원이 발표한 한국수어 관련 조사에 따르면, 공공기관을 혼자 이용할 때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응답한 농인은 25.2%로 나타났다. 반면 ‘모두 이해한다’는 응답은 17.2%에 그쳤다. 이는 일부 이용자에게는 서비스가 존재하더라도, 그 안의 정보를 스스로 이해하고 활용하기까지 여전히 높은 장벽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보완할 수 있는 구조도 충분하지 않다. 중간에 막히거나 잘못 선택했을 경우, 이용자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여지는 제한적이다. 결국 이용자는 서비스를 끝까지 진행하기보다 주변의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일부 이용자에게 현재의 디지털 서비스는 여전히 주변의 설명이나 도움을 통해 이용이 완성되는 구조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농인에게 더 크게 나타나는 ‘언어의 공백’
이 구조는 농인에게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국수어를 주요 언어로 사용하는 농인에게 한국어 텍스트 중심의 서비스는 추가적인 이해 과정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있다. 한국수어와 한국어는 문법과 표현 체계에 차이가 있어, 한국어 문장 중심의 안내 체계는 한국수어 사용자의 언어 환경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중요한 조건이나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기도 한다.
특히 금융 서비스에서는 이러한 부담이 더 크게 작용한다. 상품 조건이나 계약 내용이 복잡하게 제시될수록, 정보 전달 과정에서 일부 내용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공공서비스 역시 행정 용어 중심의 안내로 인해 직관적인 이해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농인 당사자들의 요구 역시 이러한 현실을 보여준다. 의사소통 지원을 위해 정부가 확대해야 할 정책으로는 ‘공공·금융·의료기관 등에 수어통역사 배치 확대’ 요구가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 수어통역 서비스 시간·횟수 확대와 문자 정보 제공 확대 역시 주요 필요 정책으로 꼽혔다. 이는 금융기관을 포함한 핵심 생활 서비스 영역에서 여전히 정보 이해와 의사소통 지원에 대한 수요가 크다는 점을 보여준다. 결국 한국어 텍스트 중심의 정보만으로는 필요한 내용을 충분히 확인하고 판단하기 어려운 환경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가족이 ‘완성’시키는 이용 방식 이러한 환경에서 가족의 역할은 단순한 보조를 넘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디지털 서비스 이용 과정에서 가족은 단순히 조작을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라, 정보를 대신 읽고 내용을 해석하며 선택까지 함께 고민하는 역할을 맡는다. 은행 앱에서 복잡한 상품 조건을 확인해주고, 공공서비스 신청 과정에서 어떤 항목을 선택해야 하는지 설명해주는 과정은 이제 일상적인 장면이 됐다.
중요한 선택이 필요한 순간에는 이러한 역할이 더욱 분명해진다. 이용자가 스스로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가족은 ‘설명자’이자 ‘중재자’, 때로는 결정 과정에 함께 참여하는 존재로까지 역할이 확장된다. 가정의 달에 자주 목격되는 이러한 모습은 단순한 도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디지털 서비스가 실제로는 개인이 아닌, 가족 단위의 참여를 통해 완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특히 농인의 경우 이러한 구조는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정보 해석 과정에서 언어적 장벽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가족의 도움이 반복적으로 필요해지는 경우가 발생한다. 안내 내용을 대신 이해해주고, 중요한 조건을 짚어주며, 필요한 절차를 함께 진행하는 과정이 반복된다. 이 과정에서 이용자는 점점 정보를 직접 확인하기보다 가족이 해석한 내용을 기반으로 이해하고 선택하는 방식에 익숙해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디지털 서비스는 개인의 이름으로 이용되지만, 실제 이용 경험은 가족의 개입과 설명을 통해 완성되는 구조에 가까워지고 있다. 가정의 달에 강조되는 ‘가족의 역할’은 이처럼 디지털 환경에서도 새로운 형태로 확장되고 있다. 다만 그 역할이 단순한 돌봄을 넘어, 서비스 이용 자체를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 되고 있다는 점은 다시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남아 있는 질문 문제는 이러한 구조가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디지털 서비스가 개인을 위한 것이라면, 이용자는 스스로 정보를 확인하고 이해하며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여전히 많은 이용자가 정보를 직접 획득하기보다 타인을 통해 전달받고, 그 과정에서 선택까지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 가정의 달에 반복되는 이러한 장면은 가족의 역할을 보여주는 동시에, 디지털 서비스가 누구를 기준으로 설계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기준에서 벗어난 이용자들은 여전히 타인의 도움을 통해서만 정보에 접근하고 선택할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다.
디지털 서비스가 점점 더 일상의 기본 인프라가 되어가는 지금, 접근성은 단순한 편의 기능이 아니라 ‘스스로 이해하고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의 문제로 이어진다. 만약 일부 이용자가 여전히 주변의 도움을 통해서만 서비스를 충분히 이용할 수 있다면, 그 공백은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