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왼쪽 세 번째)이 4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시장상황점검회의에서 이찬진 금융감독원장,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 이억원 금융위원장과 기념 촬영하고 있다. 연합뉴스
원·달러 환율이 2009년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1540원을 넘어섰다. 외환당국의 구두개입도 소용이 없었다. 중동전쟁 장기화와 외국인 주식 매도에 미국의 관세 위험까지 겹친 탓이다. 환율 1600원 선까지 치솟을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4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보다 13.6원 오른 1530.0원에 출발했다. 1530원을 넘겨 거래를 시작한 것은 세계 금융위기 때인 2009년 3월 10일(1561.0원) 이후 17년 3개월 만이다. 지난달 15일 1500.8원으로 마감한 뒤로는 3주째 1500원 선을 웃돌고 있다.
이날 오전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정부서울청사에서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 이억원 금융위원장, 이찬진 금융감독원장과 시장상황점검회의를 열고 대응에 나섰다. 구 부총리는 “대외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에서 불안 심리가 퍼지지 않도록 높은 경계감을 가지고 예의주시하고 있다”며 “과도한 쏠림 현상에 대해서는 필요한 조치를 즉시 취하겠다”고 밝혔다.
외환당국의 움직임에 환율은 오전 9시15분쯤 개장가 대비 10원가량 내려선 1520.0원까지 하락했다. 그러나 이내 방향을 틀어 1530원에 다시 접근했고, 등락을 거듭하다 결국 1529.7원에 오후장(3시30분)을 마감했다. 구 부총리의 구두개입도 딱히 효과가 없었다는 의미다.
야간 거래 시작 후 다시 급등세를 보인 환율은 오후 5시를 넘어 1540원을 돌파했다. 익명을 요청한 외환시장 관계자는 “이날 외환당국의 소규모 시장개입(스무딩 오퍼레이션)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데도 환율이 오히려 올랐다”고 설명했다.
이번 환율 급등세의 직접적인 계기는 호르무즈 리스크다. 이란이 쿠웨이트 공항을 공격했고, 미국은 호르무즈 해협 인근 이란 케슘섬을 타격했다. 미국과 이란의 종전 협상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 국제유가는 배럴당 90달러대 후반으로 다시 뛰었다. 달러인덱스도 99.5선까지 오르는 등 달러 강세가 원화 약세(환율은 상승) 압력을 키웠다. 여기에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한국에 12.5% 추가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원화 약세에 기름을 부었다.
백석현 신한은행 이코노미스트는 “미국과 이란 간 합의 자체가 어려운 구조라는 점과 시간이 이란 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시장 참여자들이 늘고 있다”고 진단했다.
물론 1500원대 환율 장기화는 중동과 미국 변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반도체 수출 호조로 경상수지 흑자는 사상 최대 수준을 기록하고 있지만, 벌어들인 달러가 국내 외환시장에 충분히 머물지 않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어서다. 한은은 최근 보고서에서 “과거에는 경상수지 흑자가 원화 절상으로 이어졌지만, 최근에는 민간의 해외 자산 선호 확대와 자본유출이 경상수지 흑자와 원화 절하를 동시에 유발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외국인의 대규모 주식 매도도 환율 상승의 또 다른 축이다. 올해 들어 외국인 투자자 주식 순매도 규모는 115조9686억원에 달한다. 이날도 유가증권시장에서 외국인은 6조9880억원을 순매도했다. 외국인은 19거래일 연속 ‘팔자’를 이어가며 역대 10번째로 긴 순매도 행진을 기록했다.
이런 매도 행렬에도 외국인이 보유한 국내 주식 규모와 비중은 지난해 말 1312조원(32.9%)에서 지난 2일 2991조원(38.3%)으로 급증했다. 국내 주가가 급등했기 때문이다. 한국 자산 비중이 커지자 이를 줄이기 위한 조정(리밸런싱)과 차익 실현을 위한 외국인 투자자의 매도가 이어지는 중이다.
원-달러 환율 추이
대내외 악재가 쌓여가는 가운데 정부의 자체 시장개입과 구두개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달 환율이 1500원대까지 오르자 외환당국은 국민연금과의 외환스와프 등 시장 안정화 조치에 나섰고, 지난달 말 외환보유액은 4269억9000만 달러로 한 달 전보다 8억8000만 달러(약 1조3500억원) 감소했다.
큰 효과를 보지 못한 데다 적극적인 방어도 더는 부담스럽다. 원화 방어를 위해 달러를 대규모로 팔면 외환보유액이 줄어든다. 중동전쟁 리스크가 살아 있는 동안 개입은 환율의 상승 속도를 늦출 수는 있어도 수준 자체를 낮추기는 어렵다. 특정 환율대를 방어한다는 신호를 주면 시장이 오히려 외환당국의 방어선을 시험할 가능성도 있다.
환율 진정을 위해 도입한 국내주식복귀계좌(RIA) 역시 효과가 미미하다. 양도소득세 면제를 내세워 해외 주식 투자 수요를 국내로 돌리려는 의도였지만 가입 잔액이 2조5000억원을 돌파했음에도 환율 흐름은 바뀌지 않았다. 더 큰 틀에서 정부는 한·미 통화스와프도 타진하고 있지만, 아직 가시적인 성과는 나오지 않고 있다. 단기 제어 수단은 한계가 있고, 시장의 심리를 돌려놓을 만한 깜짝 카드 역시 찾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가고 있는 셈이다.
양준석 가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는 “시장개입으로 외환보유액이 줄어들면 시장 불안감이 커지고, 오히려 외환위기를 걱정하는 심리가 생기면서 환율이 더 오를 수 있다”며 “환율이 1500원 아래로 내려가려면 중동전쟁의 종식이나 그에 준하는 큰 충격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당분간 환율이 1500원대에서 높은 변동성을 보일 것으로 예상한다. 박형중 우리은행 이코노미스트는 “쓸 수 있는 정책 수단이 거의 소진됐고, 난국을 타개할 창의적인 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하반기 미국 통화정책 불확실성과 물가 부담이 겹치면 환율 1600원 수준까지도 열어놔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환율 상승을 외화 유동성 측면에서만 보면 금융위기 위험은 크지 않다고 볼 수 있지만, 환율은 가격 변수이기 때문에 높은 수준이 이어지는 것 자체가 문제”라며 “전쟁이 끝나더라도 국내 투자 여건과 정치적 불확실성 등을 고려하면 환율이 더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