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체코, 멕시코와 격돌할 과달라하라 경기장. 해발 1571m다. [신화통신=연합뉴스]
태양과 부쩍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북위 20도의 강렬한 햇살이 정수리를 찌르듯 뜨거웠다. 3일(한국시간) 한국 축구대표팀이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1, 2차전을 치를 멕시코 과달라하라 스타디움에 들어서자 턱 밑부터 숨이 차올랐다. 이곳은 강원도 오대산 정상과 맞먹는 해발 1571m의 고지대다.
손가락에 산소포화도 측정기를 끼워보니 93%를 가리켰다. 경기장 주변을 가볍게 달린 뒤 재보니 90~91%로 뚝 떨어졌다. 인천공항에서 쟀을 때는 98%였다. 가만히 서 있어도 가슴이 답답한 이곳에서 우리 선수들이 90분간 뛰어야 한다.
인천공항에서 산소포화도는 98%였다. 강정현 기자
과달라하라 스타디움 앞에서 산소포화도는 90%로 떨어졌다. 몸에 공급되는 산소량이 줄어들었다는 의미다. 강정현 기자
경기장의 외관은 거대한 화산을 닮았다. 경사진 외벽은 푸른 잔디로 덮여 있고, 회백색 지붕은 화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고리를 연상케 했다. 분화구처럼 움푹 들어간 내부는 붉은색 4만8000석 관중석이 시야를 압도한다. 경기장 관계자는 “멕시코 홈팬들의 함성은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분화구 안에서 증폭돼 상대 팀에 위압감을 준다”고 했다. 실제로 멕시코는 2019년 이후 자국 홈경기에서 15승 7무를 기록 중이다. 모든 경기장이 원정팀의 무덤이다.
과달라하라는 다른 멕시코 도시보다 유난히 으스스하다. 할리스코주의 주도인 이 도시는 넷플릭스 드라마 ‘나르코스’나 ‘오자크’ 속 잔혹한 마약 조직의 실제 모델이자, 현재 멕시코에서 가장 위험한 세력으로 꼽히는 ‘할리스코 신세대 카르텔(CJNG)’의 본거지다. 2022년부터 스타디움 인근 부지에서만 456개의 시신 가방이 암매장된 채 발견됐다. 지난 2월 두목 네메시오 오세게라(일명 엘 멘초)가 사살된 이후 보복 사태가 이어졌으나, 지금은 월드컵을 앞두고 표면적인 평온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기관총으로 무장한 멕시코 국가방위대(GN) 대원들이 경기장 사방을 경계하는 이유다.
순찰 중인 멕시코 국가방위대. 강정현 기자
시내 중심가 벽에는 카르텔에 납치된 실종자들의 빛바랜 사진이 빽빽이 붙어 있었다. 실종자 가족들은 “정부가 치안 실패를 감추기 위해 월드컵이라는 화려한 포장지만 씌우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거리의 광고판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하비에르 아기레 감독과 멕시코 스타 선수들의 모습과 대조를 이뤘다.
본래 이 경기장은 멕시코 명문 클럽 CD 과달라하라(치바스)의 홈구장으로, 건설 비용만 2억 달러(약 3060억원) 이상이 투입됐다. 2010년 개장 기념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초청해 경기를 치렀고, 복서 카넬로 알바레스의 타이틀 방어전과 샤키라, 브루노 마스의 콘서트도 열렸다. 이곳에서 한국-체코, 한국-멕시코전은 물론 스페인-우루과이전 등 빅매치가 잇따라 열린다. 그라운드에는 16㎜로 짧게 깎인 난지형 잔디가 깔려 있었다. 과달라하라는 6월부터 우기에 접어든다. 경기는 모두 야간에 킥오프되는 만큼, 낮 최고 27도까지 오른 대지가 소나기를 만나 식으면 경기 시간엔 21~24도 안팎이 될 것으로 보인다.
취재를 마치고 현지 펍에서 데킬라를 들이켰다. 손등에 소금을 묻히고 레몬을 입에 대려던 순간, 옆자리 현지인 세바스티안이 말을 건넸다.
“아미고(친구). 멕시코에선 이 쓴 술을 찡그리지 않고 삼켜야 진짜 남자로 인정받아. 이 작은 잔도 못 버티면서 우리 축구를 이기겠어?” 웃으며 건넨 농담이었지만 원정팀의 무덤의 서늘한 텃세가 느껴졌다. 고지대의 박한 공기, 으슥한 도시의 기운까지. 과달라하라가 한국 축구대표팀에 던진 첫날 메시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