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나는 추모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당신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우리의 청춘은 끝이 났다.” 17년 뒤 영화 ‘마이클’을 본 뒤 생각했다. 내 청춘은 끝났지만, 마이클은 영원히 끝나지 않겠구나.
영화는 청소년 시절을 온통 마이클 잭슨의 전성기와 겹치게 보냈던 ‘586세대’의 가슴을 크게 일렁이게 만든다. 천사 같은 목소리로 ‘벤’을 부르던 어린아이가 어느 날 천지개벽할 문워크와 ‘스릴러’ 뮤직비디오를 들고나와 세상을 통째로 뒤흔들었다. ‘아, 지금 한 시대가 바뀌고 있구나’라는 짜릿한 깨달음이 전율과 함께 왔던 때. 팝송 키드가 아니었더래도 그 시절을 지낸 청춘들이 공유하는 선명한 기억이다.
영화 ‘마이클’, 옛 감동 일깨워
젊은 세대는 틱톡·쇼츠로 즐겨
당신의 혁신은 인류가 받은 선물
사실 영화는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아버지와의 평생의 갈등 외에 그의 인생을 깊이 있게 파고들 의지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요즘 젊은 세대에게 그가 낯선 옛날 인물이 되면 어쩌지?” 같은 걱정만큼은 덜어준다. 적어도 관객의 머릿속에 역사적 ‘팩트’ 하나는 콱 박아주기 때문이다. 그가 당시 막 시작된 ‘뮤직비디오’라는 플랫폼을 어떻게 통째로 뒤바꿔놓았는지, 그 안에서 인종 장벽을 허물고 안무와 서사의 문법을 어떻게 혁명적으로 재정의했는지를 말이다.
특히 “흑인이기 때문에 MTV에 틀 수 없다”던 방송사를 설득해 대작 ‘스릴러’가 방영되는 순간은 새삼 전율을 일으킨다. 브루노 마스 같은 수퍼스타가 흑인임을 더 이상 의식하지 않게 된 것, 노래와 춤이 동등한 예술이 된 것, 1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완벽주의 퍼포먼스, 서사를 가진 뮤직비디오 스타일까지. 지금 대중문화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문법은 결국 그가 인생을 바쳐 이룩한 거대한 DNA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정수로 물려받아 눈부시게 피워낸 꽃이 바로 지금의 K팝이다.
방탄소년단 정국의 솔로곡 ‘스탠딩 넥스트 유’를 보자. 시선을 장악하는 화려한 스텝과 강렬한 골반 튕김, 정(靜)과 동(動)을 오가는 퍼포먼스 등은 단순한 오마주를 넘어선다. 그것은 자신의 음악이 어떤 거대한 계보 위에 서 있는지를 공표한 ‘헤리티지의 선언’이었다. 마이클 잭슨이 살아있었다면 정국과 나란히 서서 세기를 교차하는 댄스 챌린지를 하며 전 세계 알고리즘을 폭파하지 않았을까. 자신을 똑 닮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세계를 호령하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흐뭇해했을까.
‘저 문워크가 지금의 숏폼 시대에 나왔더라면’ 하는 상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건 그래서다. 숏폼을 흔히 ‘바이럴 매체’라 부른다. 바이러스처럼 인기를 퍼뜨린다는 의미다. 1983년 모타운 레코드사 25주년 무대에서 그가 처음 ‘빌리진’과 문워크를 선보이던 순간, 전 세계는 마이클이라는 바이러스에 자발적으로 감염됐다. 몇 주가 지나서야 겨우 뮤직비디오를 볼 수 있었던 그 시절에도 사람들은 방구석에서 친구들 앞에서 문워크를 흉내 냈다. 나도 모르게 발을 뒤로 밀게 만들던 전 지구적 챌린지였다.
지금의 틱톡과 쇼츠가 작동하는 원리도 정확히 이와 같다. 첫 번째 몇초에 시선을 훔치는 압도적인 직관성, 그는 그 강렬함을 쇼츠의 수십초가 아니라 무대 위에서 내내 유지했다. 그는 인간의 뇌가 청각뿐 아니라 시각 자극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본능적으로 알았던 선구자였다.
우리 뮤직비디오 세대는 무대 위의 완벽한 마이클만 알았다. 반면 지금의 쇼츠 세대는 우리가 몰랐던 그의 인터뷰와 고난, 그리고 사운드를 까다롭게 체크하다가도 이내 “잇츠 올 러브”라고 나직하게 속삭이는 무대 뒤 진짜 목소리를 숏폼으로 접한다. 무대 위에선 천상의 존재로 찬양하다가도 무대 아래에서는 ‘기괴한 은둔자’로 치부했던 그를, 요즘 세대는 가장 인간적이고 입체적인 모습으로 이해해가리라 믿는다.
그때도 지금도 여전한 추문과 논란. 그러나 무대 위에서 그가 이룩한 것은 그 모든 것과 별개로 인류가 받은 선물이었다. 그가 그리워질 때면 1983년 그 전설의 무대로 늘 돌아간다. 수줍게 “뉴 송(New song)”이라 말한 뒤 소박한 핀 조명 아래서 그는 마치 어린 새가 파드닥거리듯 혼자 춤을 추며, 외롭게 역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역사가 오늘날 케이팝이 되고 숏폼이 되었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시공간을 초월한 위안이다. 고마워, 마이클. 당신은 여전히 여기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