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와 전쟁의 한복판에서 타인과 더불어 사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는 시기이다. 미술은 세상 돌아가는 일과 무관해 보이지만, 사실 타인과 공동체는 언제나 동시대 미술의 중요한 화두였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중에도 타자와 이방인을 주제로 다룬 작품들이 제법 있다. 흥미롭게도 대체로 사진이다. 사진은 시선과 프레임의 예술이다. 타인의 얼굴을 담을 때 가장 흥미로워지고, 동시에 가장 위험해진다.
주명덕의 1960년대 고아원 연작
혼혈 고아들의 존재 널리 알려
국제결혼 커플 다룬 김옥선의 연작
어디에나 있는 부부 사이 장벽 포착
이방인 체험 살린 요코미조 시즈카
일면식 없는 타인 승낙할 때만 촬영
소장품 중 타인의 얼굴을 가장 강렬한 방식으로 마주하게 하는 작품은 주명덕(1940~)의 ‘섞여진 이름들’이다.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사의 기념비적 프로젝트로 평가받는 수작이다. 이 사진들을 보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이국적인 고아 외모에 충격
주명덕, ‘섞여진 이름들’, 1965. 한국전쟁 때 생긴 혼혈 고아들의 보육원을 방문해 충격받고 찍은 연작 사진이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사진의 촬영 연도는 1965년, 한국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조금 지난 해였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주명덕은 누나가 자원봉사로 일하던 서울 불광동의 보육원에서 놀라운 모습을 발견했다.
바로 이국적인 외모의 아이들이 모여 있는 광경이었다. 미군과 한국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나 보육원에 보내진 아이들. 당시로써는 이 아이들의 존재 자체가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 보육원은 한국의 전쟁고아를 보살피기 위해 미국에서 건너온 선교사 부부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물론 한국인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카메라의 시선이 닿은 곳은 따로 있었다. 출생부터 보육원에 오기까지, 말 못할 사연이 겹겹이 있으리라 짐작되는 얼굴들. 더구나 다름을 유난히 불편해하는 한국 사회에서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쉽지 않으리라 예상되는 얼굴들이었다.
이 사진들은 1966년, 서울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열린 전시를 통해 세상에 공개됐다. 전시의 제목은 ‘홀트씨 고아원.’ 아이들의 초상 95점은 관람객의 심금을 울렸다. 여러 매체에서 전시를 비중 있게 다루면서 ‘혼혈 고아’의 존재를 널리 알렸다. 얼굴 자체로 전쟁의 비극성을 고발하는 아이들이었다.
이는 1960년대라는 시대적 맥락 안에서 충분히 유효하고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사회의 그늘진 곳에 시선을 던지는 것은 언제나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이미지화하는 일에 훨씬 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함을 안다. 그 이미지가 비극의 상징으로 전시될 때는 더욱 그렇다. 이 사진들이 다큐멘터리로서 지닌 강력한 힘과 성취를 인정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은 이유이다.
한편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는 이 사진들이 아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 같다. 60년이 지난 현재, 한국의 인구 구성도 상당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는 한국의 인구 20명 중 1명 이상이 ‘이주 배경인구’라는 통계가 발표됐다. 이주 배경인구란 본인이나 부모 중 한쪽이 태어날 때부터 한국 국적자가 아닌 경우를 뜻한다. 3개월 이상 국내에 체류 중인 외국인, 귀화한 사람, 이민자 2세 등도 포함된다.
김옥선, ‘영어 선생들-함일의 배’, 2008. 제주도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외국인들의 나들이 모임을 담았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런 이주 배경인구의 삶에 일찍이 주목해 온 사진작가로 김옥선이 있다. 그의 2008년작 ‘영어 선생들’은 제주도의 학교나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외국인들을 담은 사진이다. 원어민 강사에 대한 수요는 높지만 한국이 지금처럼 인기 있는 나라는 아니었던 시절이다.
사진 속 인물들은 해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날씨가 따뜻해지는 6월부터 11월까지, 이들은 주말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모래사장에 모였다. 해수욕이나 일광욕을 하다가 해가 지면 함께 저녁을 먹고 헤어지는 것이 일과였다.
출신 국가와 한국에 온 이유만큼, 사진 속 표정과 자세도 제각각이다. 이방인이라는 사실 외에는 별다른 공통점도 없는 이들이지만 어쩌면 이런 결핍의 공유야말로 서로를 이해하는 데 가장 유효한 조건인지도 모른다.
결핍의 공유가 이해의 조건 김옥선이 이런 주제에 관심을 가진 데는 개인적인 이유가 있다. 1968년생으로 줄곧 서울에 살던 그는 외국인 남성과 결혼을 하고, 제주도로 이주하면서 처음으로 ‘주변부’의 삶을 경험하게 되었다. 당시의 한국은 외국인과 결혼한 여성에게 한층 더 가혹했다. 예컨대 1998년 국적법이 개정되기 전까지 외국인 남성과 결혼해 낳은 자녀는 아버지를 따라서 외국인 국적으로 살아가야만 했다.
김옥선이 모국에서 타자화된 삶을 경험하면서 시작한 프로젝트가 2000년 무렵 발표한 ‘해피투게더’였다. 한국에 살고 있는 국제결혼 커플을 찾아가 가족의 모습을 촬영한 연작이었다.
김옥선, ‘해피투게더’ 연작 중 ‘옥선과 랄프’, 2002.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작가 본인이 직접 모델로 등장한 ‘옥선과 랄프’에서 부부는 썩 편안해 보이지 않는다. 똑같은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지만 자세와 표정부터 상반된 두 사람 사이에는 무언가 심리적인 장벽이 있는 것 같다. 한편 ‘미련과 슈테판’에서는 유일하게 카메라를 바라보는 미련에게 시선이 간다. 이 가족에서는 아무래도 유일한 ‘자국민’인 아내이자 엄마에게 좀 더 막중한 임무와 역할이 주어질 것이라 짐작이 된다.
‘해피투게더’ 연작 중 ‘미련과 슈테판’, 2002.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두 사진 모두 전형적인 한국 집의 거실을 배경으로 한다. 공간이 유난히 답답해 보이는 것은 인물들이 정서적으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족끼리 싸우면 집이 숨 막히게 좁아지는 법이다.
이 사진들의 흥미로운 지점은 ‘국제결혼 부부’라는 특수한 설정이 오히려 더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성찰로 이어진다는 데 있다. ‘저 가족의 갈등은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개인적인 차원의 것인가.’
애초에 부부라는 관계에는 수많은 변수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같은 문화권이라고 서로 더 잘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좁은 공간 안에서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며 살아간다. 타인과의 공존은 늘 어렵다. 다르면 달라서, 비슷하면 비슷해서 힘든 것이 타인과의 관계이다.
요코미조 시즈카, ‘타인’ 연작들, 1999~2000.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타인을 다룬 미술관 소장품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것은 요코미조 시즈카의 ‘타인’ 연작이다. 영어 원제는 ‘stranger’. 의미상으로는 ‘낯선 사람’에 좀 더 가까운 느낌이다. 실제로 작가가 일면식도 없는 인물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작업이다.
이 작품은 촬영 과정 자체가 핵심이다. 작가는 먼저, 낯선 사람의 우편함에 편지를 넣는다. “낯선 당신에게(Dear Stranger), 저는 모르는 사람을 촬영하는 작업을 진행 중인 사진작가입니다”로 시작되는 편지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해 주기를 정중하게 권한다. 그리고 동의한다면 약속된 시간에 거리로 난 창문 앞에 서서 커튼을 젖힌 채 몇 분간 머물러 달라고 요청한다. 작가는 정해진 시간에 창문 밖 거리에 카메라를 세워두고 기다리다가, 상대방이 창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면 조용히 셔터를 누르고 사라진다.
이후 촬영된 결과물을 다시 우편으로 보내 최종 사용 허가를 받으면 비로소 작품이 완성된다.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작가와 모델은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으며, 끝까지 ‘낯선 관계’로 남는다.
작가 요코미조 시즈카는 1989년부터 영국에 정착해 살고 있는 일본인이다. 이방인으로서 겪은 관계 맺기의 어려움이 이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사진 속 인물들은 모르는 사람의 편지를 받아 들고, 아마도 고심 끝에 조심스럽게 커튼을 열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로 결심한 이들이다. 그래서인지 약간 긴장한 듯한 표정도 보인다. 카메라가 포착한 것은 생면부지의 타인이었던 사람들이 단 몇 분이나마 창문을 사이에 두고 연결되어,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낸 마법 같은 순간이다.
타인은 나를 이해하게 만드는 존재 사진에는 확실히 시대의 인장이 찍힌다. 이방인을 다루는 방식도 시대와 함께 변화했다. 주명덕의 사진에는 사회상을 고발하는 직접적이고 강렬한 시선이, 김옥선의 사진에는 내부자로서 주변인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담담하고 유보적인 태도가 담겨 있다. 한편 각 시대의 문제의식과 감수성에 빗대어 2026년의 한국사회를 보면, 다름 자체에는 좀 더 관대해지고 타인을 대하는 문제에는 좀 더 엄격해진 것 같다.
그럼에도 시대를 불문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타인은 곧 나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드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외모든 생각이든, 나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는지가 결국 나의 세계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타인을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속하는 존재로 상정하는 일도 위험하지만, 같은 공간에 있다고 이해와 동조를 요구하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할 일이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낯선 존재들이다. 서로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다. 너도 나와 같은 이방인이라는 마음으로 서로 연민을 가지는 것도 괜찮다. 그리고 가끔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줄 정도의 여유가 있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간혹 무언가 근사한 것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요코미조 시즈카의 사진에 담긴 마법 같은 순간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