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금융시장에서는 비금융 데이터를 활용하는 등 신용평가체계의 개선 움직임이 한창이다. 기존의 신용평가시스템은 과거 금융이력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데 중·저신용자를 구조적으로 배제하고 청년층에게도 불이익을 준다. 중금리 대출시장을 무너뜨려 가운데가 비어있는 ‘도넛경제’를 초래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 문제에 대해 김용범 정책실장이 SNS에 쓴 글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미국은 실시간 매출·입출금 등 현금 흐름을 정밀분석해 대출 결정
한국은 오픈뱅킹·마이데이터 잘 구축해 놓고도 단편적으로만 활용
금융위·행안부·개인정보위로 나뉜 칸막이 규제로 데이터 융합 차질
빅테크 비금융데이터 공개하고 법 체계도 중장기적으로 일원화를
해법으로는 대안신용평가 활성화 등이 부각하고 있다. 정책보증 확대, 정책금융 연계 등의 방법을 쓸 수도 있는데 정부의 재정 부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의 연체 여부’보다 ‘현재 경제활동과 현금 흐름’ 데이터를 활용하는 대안신용평가는 재정 부담을 최소화하면서도 금융 사다리를 복원하는 생산적인 대안이다. 데이터가 ‘인공지능(AI) 시대의 석유’라는 점을 고려하면 현 정부의 AI 활성화 정책 기조와도 맥을 같이한다.
데이터는 비경합적, 소유권이 중요
그런데 데이터는 석유와 중요한 차이점도 지닌다. 석유는 쓸수록 고갈되지만, 데이터는 그렇지 않고 여러 사람이 동시에 무한히 사용할 수 있다. 또한 다른 데이터와 결합할수록 부가가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는 특성이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 찰스 존스 교수와 크리스토퍼 토네티 교수는 2020년 발표한 논문 ‘비경합성과 데이터 경제학(Nonrivalry and the Economics of Data)’에서 이러한 데이터의 비경합성에 주목했다.
이 논문은 두 가지 소유권 시나리오를 비교한다. 먼저 기업이 데이터를 소유할 때 기업은 경쟁 우위를 지키고 지대를 추구하기 위해 데이터를 자신들의 서버에 가두고 되도록 공유하지 않는다. 이러한 데이터 독점과 파편화는 사회 전체적인 데이터 활용도를 떨어뜨리고 후생을 감소시킨다. 반면에 데이터 소유권을 소비자에게 부여하면, 소비자는 비경합성을 이용하여 자신의 데이터를 여러 기업(다수의 은행 및 핀테크사)에 전송해 활용함으로써 개인의 후생은 물론 경제성장에도 기여하게 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각 소비자는 자신의 데이터 공유에 따른 사생활 침해 가능성과 효용을 스스로 저울질하며 판단을 내리게 된다.
데이터 주권(Data Sovereignty)을 확립하려는 현실에서의 움직임은 이 논문의 결론과 맞닿아 있다. 데이터 주체의 기본권을 정립하려는 노력이 경제 전체의 관점에서도 타당한 것이다. 이를 금융 부문에서 실현하는 사례로 미국의 현금 흐름 기반 언더라이팅(Cash Flow Underwriting)과 영국의 오픈뱅킹(Open Banking) 등을 들 수 있다. ‘내 데이터의 진짜 주인은 은행이 아니라 나(개인)’라는 관점에서, 개인이 주도적으로 데이터를 활용해 실질적인 이득을 얻어내고 있다.
미국의 현금 흐름 기반 언더라이팅은 전통적인 신용점수(credit score)나 부동산 담보 대신, 차입자의 실시간 매출이나 은행 계좌의 실시간 입출금 내역(현금 흐름)을 정밀하게 분석해 대출 한도와 금리를 산정하는 고도화된 심사기법이다. 기존의 신용평가체계에서는 신용 점수가 낮거나 담보가 없어 금융에서 소외됐던 소상공인·청년·취약계층이 자신의 실시간 현금 흐름 데이터(행동 데이터)를 직접 증거로 제출함으로써 정당한 금융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개인이 데이터 권리를 행사해 금융 장벽을 허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상으로는 영국의 오픈뱅킹이 더 먼저다. 이 제도는 고객이 동의하면 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해당 고객의 금융 데이터(계좌 잔액, 입출금 내역 등)를 핀테크 기업 등에 안전하게 전송하도록 법적으로 의무화한 제도다. 과거에는 내 금융 정보임에도 불구하고 은행이라는 거대한 ‘성벽’ 안에 갇혀 있어 다른 서비스를 이용할 때 활용하기 어려웠다. 오픈뱅킹은 “내 데이터의 통제권은 나에게 있으니, 내가 원하는 기업에 이 데이터를 넘겨 더 좋은 서비스를 받겠다”는 데이터 주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한 주요 사례이다.
‘고속도로에 차 못 다니는’ 한국 그럼 우리 상황은 어떠한가? 사실 한국은 이러한 선진 제도들을 빠르고 과감하게 도입한 인프라 강국이다. 2019년 오픈뱅킹을 통해 금융권의 이체·조회 장벽을 낮춘 데 이어, 2022년 금융 마이데이터를 전격 시행했고, 최근에는 전 산업 마이데이터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다. 특히 정부 주도의 강력한 표준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에 데이터의 품질·안정성·보안성이 탁월하다. 데이터의 유실이나 오염 확률이 극히 낮아 대안신용평가를 활성화하고 포용적 금융을 확대할 수 있는 훌륭한 ‘고속도로’를 닦아놓은 셈이다.
그러나 이토록 훌륭한 고속도로를 구축해 놓고도 “왜 현장에서 대안신용평가와 현금 흐름 언더라이팅은 미흡한가?”라는 뼈아픈 비판이 제기된다. 근본적인 원인은 한국의 오픈뱅킹과 마이데이터가 여전히 ‘결제 편의 중심’이거나 ‘단순 정보 조회 서비스’ 수준의 단편적인 도구에 머물러 있을 뿐, 진정한 데이터 주권 시스템으로 진화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데이터 고속도로를 잘 구축하고서도 대안신용평가가 미흡하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는 뭘까? 우선 한국의 오픈뱅킹은 간편 송금과 대시보드식 통합조회 등 생활금융 UX 혁신에는 성공했으나 데이터의 민주화와 신용 창출이라는 심층 영역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마이데이터 역시 초기 설계부터 정보의 이동(API)과 표준화된 조회(Display)에 과도하게 집중하고, 소비자가 자기 데이터를 능동적으로 활용하는 ‘권리 행사’ 관점은 상대적으로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기에 더해 신용평가시스템으로 유입되는 데이터의 ‘질적 분절’과 ‘파편화(Data Silo)’ 문제도 심각한 병목이 되고 있다. 현재 한국의 마이데이터는 소관 부처와 근거 법령에 따라 세 갈래로 나뉘어 있다. 신용정보법에 근거한 금융 마이데이터는 금융위원회, 전자정부법에 근거한 공공 마이데이터는 행정안전부, 개인정보보호법에 근거한 비금융(전 분야) 마이데이터는 개인정보보호위원회 소관이다. 부처가 다르다 보니 인증 방식, 데이터 전송 규칙, 표준화 포맷이 다르다. 데이터 주체와 직접 연관이 없는 칸막이 규제 때문에 데이터의 융합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반쪽짜리 한국형 마이데이터 플랫폼 대기업들의 ‘데이터 폐쇄성’은 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며 “한국형 마이데이터는 반쪽짜리”라는 비판을 자초한다. 금융회사들은 법에 의해 계좌거래 내역과 카드 결제 데이터 등을 개방하고 있는 반면, 거대 플랫폼 기업(빅테크, e커머스, 배달 플랫폼 등)들은 자신들의 서버에 모인 비금융 활동 데이터(배달 앱 매출 패턴, 리뷰 평판, 정산 주기 등)를 영업비밀, 개인정보 등의 명분 아래 제대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 데이터의 심각한 비대칭성이 초래되고 있는 것이다. 데이터 주체의 관점에서 금융이든 비금융이든 모두 ‘나의 경제활동을 증명하는 내 데이터’들은 데이터 주체의 명령으로 다수의 사용처에 동시 전송될 수 있어야 한다.
데이터 주권의 확립은 단순히 선언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인프라 등 여건이 조성돼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다양한 금융·비금융 데이터가 통합 활용될 수 있는 역동적인 데이터 생태계가 조성돼야 한다. 데이터는 다양할수록 가치가 커지는데 특히 금융·비금융 데이터의 결합 시 부가가치 증대 효과가 매우 크다. 이에 따라 금융·공공·전산업 등으로 구분된 마이데이터 정보들이 손쉽게 연결되고 결합될 수 있도록 개선할 필요가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신용정보법과 개인정보보호법으로 이원화된 법체계를 일원화해야 한다. 이를 통해 개인신용정보 등 금융정보가 신용정보법뿐 아니라 개보법에 의해서도 중복 규제를 받는 문제도 해소하면 좋겠다.
아울러 마이데이터업 및 데이터 거래를 활성화하는 한편 공공데이터 개방을 더 확대하고, 대규모 플랫폼 데이터 일부를 공유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신생 핀테크 스타트업이나 지역 소형 금융기관들이 겪는 데이터 부족, 즉 ‘콜드스타트(Cold Start)’ 문제를 해결해 줘야만 시장의 독과점이 깨지고 건전한 금리 인하 경쟁이 유발된다. 표준화된 통합 데이터 플랫폼을 조속히 구축해, 금융기관 간의 데이터 단절을 막고 다양한 대체데이터(Alternative Data) 활용이 여신 심사 현장에서 실시간 가동될 수 있도록 튼튼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이는 그동안 소외되거나 불리한 처지에 있던 데이터 주체들을 돕는 동시에 경제 전체의 후생을 늘리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