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복잡한 질문에는 거의 항상 깔끔하고 그럴듯하지만 틀린 쉬운 답이 있다”라는 말이 있다. 필자는 ‘제왕적 대통령제’도 그런 답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곤 한다. 한국정치의 문제를, 대통령들이 불행하게 되는 원인을, 개헌을 논할 때마다 어김없이 나오는 답이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와 권력분산이다. 우리나라 전·현직 대통령들에게 일어난 잔혹사는 실로 현대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어렵다. 전후 가장 성공적 발전을 이룬 나라에서 망명, 시해, 투옥, 탄핵, 자결, 검찰조사를 거치지 않은 대통령을 헤아리기 쉽지 않다. 그것이 한국 대통령제의 제왕적 권력 때문인가? 그렇다면 역대 대통령들은 왜 그 제왕적 권력을 제대로 사용해 정당하고 효율적으로 국정운영을 하지 못하고, 비난 받고 응징 받도록 사용해왔는가?
투명하고 엄정한 법질서 요구되나
현 법제도에선 국가정체도 가져와
국가체제 정비는 지금 시대적 과제
투명하면서도 역동적 체제 갖춰야
퓰리츠 상을 두 번이나 받은 존 업다이크(1932~2009)는 ‘The New Yorker’지에 미국 대통령직은 “전직 대통령이 되는 축복받은 상태로 가는 길목에 있는 중간기착지에 불과하다”는 익살 섞인 논평을 실은 적이 있다. 트럼프라는 특이한 대통령 임기 중에도 오바마 전 대통령부부는 강연, 출간, 자문, 사업 등으로 수천만 달러 이상의 수입을 올리고, 하와이 별장을 지으며, 부호들과 호화 요트여행을 즐기는 사진이 심심찮게 올라와도 다수 국민들로부터 훌륭한 전직 대통령으로 존중 받고 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부부도 별로 다르지 않다.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은 퇴임 후 수익성 좋은 위스키 양조장을 세웠고, 윌리엄 태프트는 연방대법원장이 되었으며, 허버트 후버는 낚시 책을 출간할 만큼 낚시를 즐겼다. 필자가 영국과 미국에서 근무하며 본 바로는 그 나라의 총리,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 못지 않은, 오히려 더 큰 실질적 권한을 가지고 국정을 운영하고 있었다.
신생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서구 국가들이 수백 년에 걸쳐 진화시킨 국가체제와 제도를 하루아침에 이식하면서 사회현실과 제도 사이에 큰 간극이 발생한 가운데 출범했다. 제헌헌법은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헌법을 전범으로 삼아 불과 한달 여 만에 작성, 심의, 통과된 것이었다. 한반도 수천 년 역사상 3권분립 민주주의제도를 경험해보지 않았으며, 이 제도의 토대가 된 계몽주의사상운동을 거치지 않았던 한국민의 의식구조, 행동양식과는 간극이 큰 법·제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은 국가운영과 경제발전을 이뤄가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한국의 압축성장은 국가운영이 법과 제도를 충실히 따라서 이루어낸 결과가 아니었다. 그 기적과 같은 성공은 제도와 현실의 간극을 비공식적, 편법으로 메워온 역사였다. 좋게 보면 융통성이었고, 사실적으로 보면 부패, 불법이었다. 정부 지도자뿐이 아니었다. 기업인, 개인도 다르지 않았다. 한국의 경제발전사, 기업발전사는 재벌총수들의 구속사, 특별사면사이기도 하다. 재벌이 한국경제를 주도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상법에는 재벌이라는 개념자체가 없다. 계열사들은 모두 상법상 독립된 기업이다. 수많은 계열사를 세워 신규사업에 진출하고 국내외 경제상황에 따른 부침을 겪으면서 분식회계, 일감몰아주기, 교차지원, 정부로비는 재벌경영에서 일상화되다시피 했고 계열사들의 실질적 경영권을 행사하는 재벌총수는 배임, 탈세, 횡령죄가 쉽게 엮어질 수 있는 구조였다. 국민 개개인들의 삶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한국의 인사청문회가 자주 파행을 겪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검찰은 털면 먼지 나지 않는 기업과 사람이 드문 물 좋은 세상에서 막강 권력기관이 되었고, 미운 사람, 표적이 된 사람들을 쉽게 구속시킬 수 있었다. 경찰인들 다르랴. 지나온 세월 한국 정치, 사회, 경제는 그렇게 운용되어 왔고, 아직도 그 그늘이 다 걷히지 않았다.
그것이 자랑스러웠다는 것이 아니다. 불법과 탈법행위를 비호하려는 것도 아니다. 우리국가, 사회제도와 한국인 행동양식과의 정합성, 국민이 대통령과 정부에 기대하는 역할과 그들이 실제 법적으로 가진 권능을 냉철히 분석하여 새로운 국가지배구조, 보상·징벌체제를 숙고해보자는 것이다. 한국은 이미 선진국 단계에 들어섰고, 국민들도 과거의 편법적, 탈법적 국가, 기업 운영에서 탈피해 투명하고 엄정한 법질서를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동시에 지금의 체제, 제도 하에서 복지부동, 구조조정과 혁신 지연, 국가정체를 초래해 오기도 했다. 과거에는 편법이 성장의 윤활유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제도 자체가 경쟁력이 되어야 한다. 격변하는 국제질서, AI 시대의 도래는 우리에게 수많은 도전과 사회개혁 과제를 던지고 있다. 국가전략을 마련하고 때로 여소야대가 되더라도 이를 실효성과 속도감 있게 추진해 나갈 수 있도록 국가체제를 정비해야 한다. 제도운영이 투명하고 정당하면서도 역동적일 수 있는 K-국가체제, 제도와 조직을 갖추는 것이 이 시대 국가과제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