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단독] 선거예산 더 받고, 용지는 덜 찍었다…정신 나간 선관위

중앙일보

2026.06.04 13:00 2026.06.04 13:23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경찰 병력이 4일 오후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규탄하는 집회가 열린 경기도 과천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주변을 통제하고 있다. 뉴스1

경찰 병력이 4일 오후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규탄하는 집회가 열린 경기도 과천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주변을 통제하고 있다. 뉴스1

선거는 막을 내렸지만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대한 신뢰는 곤두박질 치고 있다. 사상 초유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촉발된 불길이 확산하면서다. 이런 가운데 선관위는 투표용지 제작 예산을 전체 유권자의 110% 수준까지 넉넉히 확보하고도 부족 상태를 방치한 것으로 드러나 논란은 더 커질 전망이다.


4일 선관위에 따르면 전날 서울 송파구 12곳과 강남구·광진구 각 1곳 등 14개 투표소에서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벌어졌다. 이로 인해 일부 시민들은 투표를 포기하거나 개표 방송이 송출되는 도중에 투표해야 했다. 일부 투표소에선 오후 10시까지 투표가 이뤄졌다. 송파구 잠실7동 제2투표소에서는 일부 시민들이 개표 중단과 재선거를 요구하며 투표함 반출을 막아서는 소동도 빚어졌다. 이현출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출구조사와 개표 현황을 보면서 투표를 하는 유권자가 발생하는 등 투표 왜곡 현상이 벌어진 심각한 사태”라고 말했다.
보수단체 회원들이 4일 경기 과천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앞에서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규탄하고 있다. 뉴스1

보수단체 회원들이 4일 경기 과천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앞에서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규탄하고 있다. 뉴스1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이날 새벽 선관위를 방문해 노태악 선관위원장과의 면담을 갖고 개표 중단과 선거 재실시를 요구했다. 개표가 끝난 이후 송언석 원내대표는 “더불어민주당에 선관위에 대한 긴급 국정조사를 진행할 것을 제안했다”고 밝혔다. 오세훈 서울시장 당선인도 이날 “엄중한 책임이 반드시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했다. 여당의 시선도 곱지 않다. 조승래 민주당 사무총장은 기자들에게 “선관위 행정을 책임지는 허철훈 선관위 사무총장 거취까지 고민해야하지 않나”라고 했다.

선관위는 전날 대국민사과 메시지를 낸 데 이어, 4일 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선관위는 다만 “공직선거법에 따른 선거의 연기나 재선거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일각에서 주장한 재선거 요구에는 선을 그었다.

 김범진 서울시선관위 사무처장이 4일 서울 송파구 잠실7동 제2투표소로 들어가려다 투표함 반출을 막는 시민들의 제지를 받고 있다.   이 투표소에서는 전날 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및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투표용지 부족으로 투표 시간이 오후 10시까지 연장됐고, 투표함이 개표소로 옮겨지지 못했다. 연합뉴스

김범진 서울시선관위 사무처장이 4일 서울 송파구 잠실7동 제2투표소로 들어가려다 투표함 반출을 막는 시민들의 제지를 받고 있다. 이 투표소에서는 전날 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및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투표용지 부족으로 투표 시간이 오후 10시까지 연장됐고, 투표함이 개표소로 옮겨지지 못했다. 연합뉴스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왜 발생했을까. 선관위에 따르면 송파구는 관내 유권자의 50% 수준으로 본투표 용지를 인쇄했다. 마찬가지로 투표 중단이 이뤄졌던 광진구와 강남구도 각각 전체 유권자 수의 50%, 55% 수준에서 투표 용지를 확보했다. 이는 중앙선관위가 각 시·도 선관위에 “유권자 수 대비 최소 50% 이상 본 투표 용지를 확보하라”고 지침을 내린 데 따른 것이다. 인쇄된 용지는 각 구내 투표소로 배분되고, 일부는 시·군·구 선관위에서 여유분으로 보관하다가 용지가 부족한 투표소에 배송하는 구조다. 선관위 관계자는 “사전투표율과 본 투표까지 합산한 투표율을 70% 이상으로 예측한 것이지만 여러 투표소에서 유권자가 더 몰려 혼선이 빚어졌다”고 해명했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6·3 지방선거 본투표가 실시된 지난 3일 서울 송파구 등 일부 투표소에서 벌어진 투표용지 부족 사태와 관련해 경기 과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항의 방문해 입장을 밝히고 있다. 뉴스1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6·3 지방선거 본투표가 실시된 지난 3일 서울 송파구 등 일부 투표소에서 벌어진 투표용지 부족 사태와 관련해 경기 과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항의 방문해 입장을 밝히고 있다. 뉴스1

그러나 선관위는 각 지방자치단체로부터는 “전체 유권자 수의 1.1배에 달하는 투표용지를 제작하겠다”며 예산을 받아간 것으로 드러났다. 예산은 초과해 타갔지만 인쇄는 절반만 한 것이다. 선관위 관계자는 “2022년 특정 정당 대표의 지지자가 투표소에서 잔여 투표용지를 탈취해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한 이후 잔여 투표용지를 줄이려고 노력했다”며 “남은 예산은 지자체에 반납한다”고 했다. 그러나 정회옥 명지대 교수는 “유권자의 참정권을 현저히 침해한 사안”이라며 “선거 관리 실패가 부정선거 음모론을 더욱 키웠다”라고 지적했다.

선관위를 둘러싼 논란은 처음이 아니다. 2022년 대선 사전투표 당시에는 코로나19 확진자·격리자투표 과정에서 기표된 투표지를 바구니나 쇼핑백 등에 담은 것이 드러나 ‘소쿠리 투표’란 비판을 받았다. 지난해 대선 때도 서울의 한 투표소에서 줄이 길다는 이유로 투표용지를 받은 채 식사를 한 유권자가 발생해 논란이 불거졌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현상이 단순 실수가 아닌 선관위의 구조적 문제에 비롯됐다고 본다. 당장 대법관이 겸직하는 중앙선관위원장을 포함해 선관위원 9명 중 8명이 비상임위원이라는 점이 문제점으로 거론된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단 1명만이 선관위 상임위원인 만큼, 조직 장악력과 이해도가 떨어지고 직원들도 제대로 감독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조직적 해이가 발생할 수 밖에 없는 구조”라고 했다. 장 교수는 “현직 대법관과 중앙선관위원장을 겸직하는 인사 관행을 개선하고 상임위원 수를 늘려야 한다”고 했다.
허철훈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이 6·3 지방선거 본투표가 실시된 3일 경기 과천 중앙선관위원회에서 서울 송파구 등 일부 투표소에서 벌어진 투표용지 부족 사태와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뉴스1

허철훈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이 6·3 지방선거 본투표가 실시된 3일 경기 과천 중앙선관위원회에서 서울 송파구 등 일부 투표소에서 벌어진 투표용지 부족 사태와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뉴스1

선관위가 1963년 ‘헌법상 독립기구’로 창설된 이후 외부 감시와 견제를 받지 않는 부분도 내부 폐쇄성을 강화하는 요인이다. 실제로 2023년 선관위 고위 간부들의 자녀와 친인척이 선관위에 부정 채용됐다는 의혹이 불거져 당시 감사원이 직무감찰에 착수했지만, 선관위는 “헌법상 독립돼 감사원 직무감찰 대상이 아니다”라며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했다.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2월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선관위의 손을 들어줬다. 한 정부 부처 관계자는 “선관위를 견제할 수 있는 기관은 국회가 유일하지만 국회도 선관위에는 ‘을’”이라며 “선관위 직원들이 선거철에 대거 육아휴직을 떠나는 사태 같은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는 것도 외부 감시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중앙선관위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3인, 국회에서 선출하는 3인, 대법원장이 지명하는 3인의 위원으로 구성된다. 정부·여당의 인선에 영향을 받는 구조이기 때문에 권력에 휘둘리기 쉽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임명 주체가 각각 달라 겉으로는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통령과 여당이, 또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원장이 선관위원을 임명하는 것”이라며 “이대로라면 정치 편향 우려를 피할 수 없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9년 1월엔 문 전 대통령 선거 캠프 특보 출신인 조해주씨가 선관위 상임위원으로 임명돼 정치 편향 논란이 일었다. 현 정부에서도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월 사법연수원 18기 동기인 위철환 변호사를 중앙선관위원으로 임명하자, 국민의힘은 “전형적인 정실인사”라고 비판했다.



김규태.이아미.류효림([email protected])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