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5일 오후 경기도 과천 중앙선관위 청사에서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김정훈 기자
6·3 지방선거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의 책임을 지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수뇌부가 5일 동반 사퇴했다. 노태악 중앙선관위원장은 이날 오후 경기 과천 중앙선관위 청사에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모든 사태에 책임을 통감하며, 중앙선관위원장 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선관위 행정 실무를 총괄하는 허철훈 사무총장도 이날 사의를 표했다. 선관위로선 2022년 제20대 대선 당시 ‘소쿠리 투표’ 사태의 책임을 지고 당시 노정희 위원장과 김세환 사무총장이 함께 사퇴한 데 이은 4년 만의 동반 불명예 퇴진이다
사태 발생 이틀 만에 선관위 수뇌부가 퇴진하며 수습에 나섰지만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여야가 국회 차원의 국정조사와 책임 규명을 다짐하는 가운데 선관위·개표소 인근에서 시위대가 이어지고 대학가에서도 선거관리 부실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잇따르고 있다.
노 위원장은 이날 “참정권이라는 국민의 소중한 권리를 침해하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발생한 것에 대해 변명의 여지가 없다”며 “신속하게 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해 개선방안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진상규명위는 학계·언론·법조계·시민단체에 속한 외부인사로 꾸려 10일 내 조사를 완료하기로 했다.
이번 사태는 본 투표 당일인 지난 3일 오후 서울 송파 12곳, 강남·광진 각 1곳 등 14개 투표소에서 투표용지 부족으로 일부 시민이 투표를 포기하거나 밤늦게까지 기다려야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불거졌다. 이날 선관위 발표에 따르면 투표용지 부족 문제는 그러나 이보다 광범위하게 발생했다.
윤재수 중앙선관위 선거정책실장은 이날 브리핑을 통해 “투표용지가 부족해서 추가로 투표용지를 송부한 투표소 개수는 전국 1만4288개 투표소 중에서 67개로 파악된다”며 “서울 35개 투표소, 부산 8개, 대구 7개, 인천 6개, 울산 3개, 경남 8개 투표소에서 투표용지를 추가 송부한 것으로 파악했고, 서울 송파구가 15개소로 가장 많았다”고 말했다. 윤 실장은 그러면서 “이 중 실제 투표용지가 부족했던 투표소는 현재까지 송파구 14개를 포함해 50개소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이미 알려진 14개보다 많았다. 용지 부족으로 잠시라도 투표가 중단됐다가 재개된 투표소도 22개소에 달했다.
윤 실장은 투표용지를 선거인 수 대비 50%로 하한선을 낮춘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윤 실장은 “구·시·군 선관위의 의결로 결정하되 대선과 총선에서는 선거인 수의 60%를 기준으로, 다른 선거에 비해 투표율이 낮은 지방선거는 50%를 하한으로 산정할 수 있도록 했다”며 “다만 지역 실정을 고려해 해당 선거구 또는 투표구별로 조정해 인쇄할 수 있도록 했다”고 했다.
그러나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3일 오후 10시까지 투표가 연장된 송파구 잠실7동 제2투표소의 경우엔 선거인의 50%가 안 되는 투표용지를 준비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날 오전 해당 투표소의 투표함이 반출되는 과정에서 발견된 투표용지 박스함엔 인쇄 매수가 1900매라고 표기돼 있었다. 1900매는 이 투표구 선거인(3856명)의 49.27% 수준이다.
윤 실장은 질의응답 과정에서 선관위가 송파구의 투표용지 부족을 알게 된 경위와 관련해선 “(오전) 11시40분쯤 송파구 위원회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서울시 선관위에 대책을 문의했다”고 말했다. 다만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그때부터 발생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상능 중앙선관위 선거1국장은 “‘투표율이 높아지고 있으니까 앞으로 투표용지가 부족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처음 문의한 것이 그 시간대였다”며 “오후 2시경부터 (투표용지가 모자란 투표소에 보내기 위한 투표용지) 불출(拂出)이 이뤄진 것으로 파악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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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일부 투표소 “35매 남았다” “추가 수령 가능하냐”
투표 용지 부족 실태를 생생히 보여주는 송파구·선관위 공무원들이 개설한 단톡방. [사진 전공노]
선관위가 추가 투표용지를 보내고도 현장의 혼란은 이어졌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전공노)이 이날 공개한 송파구와 선관위 공무원 단체 카카오톡 대화방 내용을 보면 잠실2동 서기는 오후 2시17분쯤 “투표소 서기들은 용지 부족할까 봐 연락이 오는 데 저희는 우선 선관위에서 모니터링한다고 답변만 드리고 있고 확답을 못 하고 있다”며 “투표소별로 몇% 정도 남아야 용지 추가 수령 여부를 알려주느냐”고 물었다.
이후 잠실4동 간사도 오후 2시25분쯤 “7투(표소)에 용지가 35매 남아 있고 대기도 많다”며 우려했고 가락2동 서기도 오후 2시37분쯤 “3투와 7투의 용지 추가 수령이 가능하냐”고 문의했다. 하지만 선관위 관계자의 답은 없었다. 그러다 오후 4시48분 이후부터 곳곳에서 투표가 중단됐다는 보고가 이어졌다. 각 투표소에서는 “부정선거 의심 민원이 생겨 (투표) 진행을 못 하고 있다” “현장 고충이 너무 심하다”는 호소도 제기됐다.
윤 실장은 선관위의 늑장 대응이 혼란을 키웠다는 지적에 대해 “여러 투표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투표용지 부족) 상황이 발생했고, 선관위 전임 직원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개표 준비 때문에 개표소로 이동하는 등 여러 상황 때문에 대처가 늦어진 것 같다”고 해명했다.
이처럼 선관위 문제가 드러나자 더불어민주당은 이날 오후 야권이 요구해온 국정조사에 동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병도 민주당 원내대표는 “(노 위원장이) 사퇴했지만, 그냥 넘어갈 수 없고 국정조사를 추진하겠다”며 “(원 구성까지) 기다릴 것도 없고 국회의장과 야당과 얘기해 빠르게 추진할 방법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참정권을 침해한 반헌법적 사태”(김재섭), “민주주의의 생명에 관한 문제”(나경원)라며 특검 수용을 촉구했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페이스북에 “여당이 국정조사를 질질 끌 경우 특검 이야기가 폭발할 수 있다”고 썼다. 한 원내대표는 야권 일각의 특검 도입 요구에 대해선 “국정조사로도 아마 충분히 사실관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일단 선을 그었다.
정치권뿐만 아니라 주요 대학도 잇따라 규탄 성명을 발표하는 등 집단 대응에 나서는 모습이다. 서울대·연세대·고려대·서강대·성균관대·동국대·한국외대 등이 이날 총학생회 또는 비상대책위원회, 단과대학생회장연석회의 명의의 성명을 발표했다. 전국 100여 개 대학 총학생회 연대체인 전국총학생회협의회(전총협)도 성명을 내고 “선거를 관리하는 헌법 기관이 국민의 한 표를 온전히 보장하지 못하는 것은 국민주권에 대한 중대한 책무 방기이자 도전”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경찰은 이날 오전 8시쯤 18개 기동대, 약 1000여 명의 경찰력을 투입해 잠실7동 제2투표소에서 투표함 2개를 모두 꺼냈다. 투표함은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에 마련된 개표소로 옮겨져 오후 3시께 개표 작업이 마무리됐다. 이 사이 재선거를 요구하는 1500여 명이 개표소 출입구 일대를 점거하면서 개표 요원 등 30여 명이 한동안 갇혔다.
이날 2개 투표함의 2000여 명분 투표지가 추가로 개표되면서 서울시의회 비례대표 의원 15명의 정당 구성이 바뀌는 일도 발생했다. 최종 개표 결과 국민의힘이 44.0%를 득표해 민주당 득표율인 43.86%를 앞서면서 국민의힘이 8석, 민주당이 7석을 가져갔다. 이전에 비해 국민의힘이 한 곳 늘고, 민주당이 한 곳 준 것이다. 오세훈 국민의힘 서울시장 후보의 득표율은 직전 48.95%에서 49.22%, 정원오 민주당 후보의 득표율은 48.33%에서 48.07%로 최종 집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