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당시 우리가 목숨을 걸고 싸울 가치가 있었는가. 누가 그렇게 묻는다면 대답은 ‘예스’다. 전장에서 죽어간 전우들을 생각해도 답은 똑같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폴 헨리 커닝엄 전 미국 한국전참전용사회 회장)
20년째 한국전쟁 참전용사 보훈 행사를 열고 있는 새에덴교회(경기 용인)가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5일(현지시각) 미국으로 직접 가서 ‘한국전 한ㆍ미 참전용사 및 가족 초청행사’를 열었다.
새에덴교회 소강석 담임목사(왼쪽에서 세번째)와 김종대 예비역 해군 소장(왼쪽에서 두번째)이 미군 한국전 참전용사들과 함께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백성호 기자
이날 오후 6시 미국 버지니아주 레스턴시의 JW 메리어트 호텔에는 100여 명의 참전용사와 가족이 참석했다. 미군 참전용사 42명과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 참전용사 12명, 그리고 미군 전몰장병 가족 40명과 한인회 관계자 등 모두 170여 명이 행사장을 가득 메웠다.
새에덴교회가 그동안 주최한 한국전 참전용사 초청 행사는 미국에서 한국의 민간단체가 주최한 보훈 행사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 지팡이를 짚거나 휠체어를 탄 노병들이 곳곳에 보였다. 멀리 텍사스와 애리조나 등에서 온 이들도 있었다. 미군 참전용사들의 평균 연령은 90대 중반이다.
한국전 참전용사인 칼레리 목사는 "몰려드는 중공군과 혹독한 겨울 추위를 견뎌야 했던 장진호 전투는 정말 가혹했다"고 말했다. 백성호 기자
인천상륙작전과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던 글렌 A. 갈테리(97) 일병은 목사가 됐다. 그가 속한 해병 제7연대는 원산에서부터 장진호에 이르는 모든 진격 경로에서 선봉을 맡았다. 최전방 소총수였던 갈테리 목사는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이 끝없이 공격해 왔다. 진지를 방어하며 많은 적을 사살했다. 보안 검색을 위해 내가 죽인 중공군의 주머니를 뒤진 적이 있다. 사진이 한장 나왔다. 아내와 두 자녀였다. 오 마이 갓! 나 때문에 그 아이들이 아버지를 잃은 셈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죄책감이었다.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오랫동안 공황장애에 시달렸다. “자다가 새벽에 놀라서 깨기 일쑤였다. 주위를 둘러본 뒤에야 깨닫는다. 아, 나는 한국에 있는 게 아니지.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났고, 아프리카에서 10년간 선교 활동을 하고 목사가 됐다. 평안을 찾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한국전 한ㆍ미 참전용사 및 가족 초청행사’에서 한국의 국가보훈부가 미군 참전용사에게 '평화의사도 메달'을 수여하고있다. 백성호 기자
한국전쟁에서 미군 전사자는 약 3만6000명, 실종자는 7000명이 넘는다. 누나와 함께 한국전 전몰장병 가족으로 행사에 참석한 로버트 더글러스 램지 3세는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램지 2세, 참전 당시 27세)를 회상했다.
“공군 조종사인 아버지는 대위였다. 평양 인근의 철로 차단 임무를 맡고 머스탱 전투기를 몰고 출격했다. 폭탄을 투하한 뒤 고도를 다시 높이다가 대공 포화를 맞았다고 한다. 전투기는 추락해 폭발했고, 아버지는 ‘작전 중 실종’으로 보고됐다. 그 후 2년 동안 어머니는 라디오 앞에서 전쟁포로 석방 명단만 기다렸다. 아버지의 이름은 끝내 없었다. 아버지의 한국전 참전 당시 누나는 2살, 나는 생후 9개월이었다.”
폴 헨리 커닝엄 참전용사는 "완전히 폐허였던 한국이 오늘날 이렇게 발전한 모습을 보면 가슴이 벅차다. 우리의 희생이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백성호 기자
1950년 9월부터 52년 2월까지 미 공군 하사로 한국전에 참전한 폴 헨리 커닝엄(96)은 “2023년 새에덴교회 초청으로 한국을 다시 방문했다. 폐허였던 한강 주변이 고층 빌딩으로 빽빽한 것을 보고 정말 놀랐다. 한국이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사실이 우리에게 큰 보람을 느끼게 한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윌리엄 찰스 브래들리 병장은 의무병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다. 청천강 전투에서 중공군과 맞서 싸우다가 후퇴하던 중 포로가 됐다. 포로수용소 수감 도중 그는 결국 사망했다. 사진을 들고 보훈행사에 참석한 여성은 브래들리 병장 여동생의 딸이다 백성호 기자
이날 만난 미군 참전용사 노병들은 하나같이 “한국이 우리를 잊지 않고 기억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새에덴교회 소강석 담임목사는 환영사에서 “우리가 어떻게 여러분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미국은 한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피를 흘려 싸워준 혈맹의 나라입니다. 더불어 수많은 선교사가 복음을 전해 준 영적 동맹의 나라입니다”라고 말했다.
소 목사는 또 “마음 같아서는 마지막 한 분이 생존해 계실 때까지 보훈 행사를 열고 싶지만, 이제는 다들 고령이시라 행사장까지 오시는 일도 너무 조심스럽다”며 “미국에서 여는 참전용사 보훈 행사는 올해가 마지막이다. 대신 한국 참전용사를 대상으로 한 국내 보훈 행사는 계속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새에덴교회 소강석 목사가 미군 참전용사들을 향해 영어로 환영사를 하고 있다. 백성호 기자
새에덴교회는 미군 참전용사들을 위해 한국의 전통 문화공연도 펼쳤다. 뒷줄 왼쪽부터 커닝엄 전 미국 한국전참전용사회 회장, 소강석 목사, 이언주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철휘 예비역 육군대장. 백성호 기자
이재명 대통령은 축하 메시지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 평화, 번영의 대한민국은 참전용사 여러분의 피와 땀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조국과 이름조차 낯선 이국의 전장에서 청춘을 바친 여러분의 헌신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굳건한 토대이자 한미동맹의 뿌리입니다”라고 위로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미국 연방 상원의원 2명도 축하 메시지 영상을 보내왔다.
워싱턴 D.C에 있는.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 한국전 미군 참전용사 전사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추모의벽이 동상들 뒤로 보인다. 백성호 기자
이튿날인 6일 오전에는 워싱턴 D.C.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에 있는 한국전 전사자 추모의벽 앞에서 미군 참전용사들과 함께 헌화식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