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한국시간)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 시내에서 차로 1시간을 달려 남쪽으로 내려가자 회색빛의 웅장한 건축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해발 2240m 화산암 바위지대에 자리 잡은 경기장은 간밤에 내린 비로 옅은 안개에 둘러싸여 묘한 위압감을 풍겼다.
북중미 월드컵 개막전이 열리는 멕시코의 '축구 성지' 아스테카 스타디움이다. 멕시코 고대 문명에서 이름을 딴 이곳은 리모델링을 거쳐 현재 8만3000명(과거 11만 명)을 수용한다. 지난해 경기장을 리노베이션한 금융회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가 이번 대회 기간에는 FIFA의 스폰서십 규정에 따라 '멕시코시티 스타디움'으로 불린다. 그러나 이름을 바꿔도 이 경기장이 품은 역사의 무게는 달라지지 않는다.
후배들에게 아낌 없는 조언을 한 이천수(왼쪽)과 신연호 감독. 강정현 기자
축구 역사의 가장 위대한 두 장면이 이곳에서 쓰였다. 1970년 '황제' 펠레(브라질)가 월드컵 트로피를 들어 올렸고, 1986년에는 '신' 디에고 마라도나(아르헨티나)가 잉글랜드를 상대로 '신의 손'과 '세기의 골'을 동시에 연출하며 신화가 됐다. 두 영웅이 같은 잔디 위에서 16년의 간격을 두고 각자의 전설을 새긴 경기장은 지구상에 이곳뿐이다. 아스테카 스타디움은 이번 대회를 통해 세계 유일하게 세 번의 월드컵 개막전을 치르는 경기장으로도 이름을 올린다.
이 성지는 한국 축구와도 인연이 깊다. 43년 전인 1983년, 한국 축구의 위대한 '원조 4강 신화'를 쏘아 올린 현장이기 때문이다. 이번 대회 홍명보호의 조별리그 경기는 다른 곳에서 열리지만, 조 1위로 토너먼트에 진출할 경우 32강과 16강전을 모두 이곳에서 치르게 된다. 전설의 무대에서 새 역사를 쓸 기회가 열려 있는 것이다.
1970년 아스테카에서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끈 펠레. AP=연합뉴스
문제는 환경이다. 아스테카 스타디움은 해발 2240m의 고지대로, 한국이 체코와 1차전을 벌일 과달라하라(1561m)보다 700m가량 더 높다. 아무리 강팀이라도 고전을 면치 못해 '원정팀의 무덤'이라 불린다. 실제로 기자가 경기장을 향해 조금 빨리 걷기만 해도 두통과 어지러움, 호흡 곤란 등 고산병 증세가 밀려왔다. 이 숨 막히는 고지대를 정복했던 두 영웅, 신연호와 이천수에게 고지대 필승 전략을 물었다.
1983년 멕시코 청소년 월드컵에서 3골을 몰아넣으며 4강 신화를 이끈 신연호 고려대 감독, 그리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예선 당시 '40년 안방 무패'를 자랑하던 이란의 고지대 아자디 스타디움(해발 1300m)을 프리킥 결승골로 침몰시켰던 이천수. 두 선배는 "철저한 준비와 강한 멘털이 있으면 고지대는 무섭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1986년 아스테카에서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든 마라도나. 로이터=연합뉴스
아스테카를 정복한 유일한 한국인 골잡이인 신 감독은 "아스테카는 산소가 부족하니까 숨이 턱 막혔다. 호흡만 힘든 게 아니라, 고산병 증상인지 훈련 중 코피가 줄줄 났다"며 "공의 속도와 바운드 높이도 확연히 달랐다. 골대와 골대 사이가 150m(실제로는 105m)쯤 되는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고 회상했다. 그럼에도 당시 한국은 홈팀 멕시코를 상대로 신 감독의 역전 결승골에 힘입어 2-1 승리를 거뒀다.
이천수 역시 고지대의 무서움을 생생히 기억했다. "당시 내 스피드는 최고였는데 아자디에선 움직임이 마치 슬로 모션 같았다. 마음은 20m 앞인데 몸은 느린 배속으로 움직였다"며 "호흡이 가빠지니 패스 실수가 잦아져 역습을 자주 허용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천수는 후반 15분 강력한 슈팅으로 이란의 골망을 갈라 아자디 스타디움을 침묵 시켰다.
아스테카 스타디움 앞에 모인 멕시코 팬들. 벌써부터 축제 분위기다. 강정현 기자
광적인 '멕시코 홈 텃세'를 경험한 신 감독은 이번 대회 조별리그 2차전에서 멕시코를 만나는 후배들에게 따뜻한 조언을 건넸다. "당시 멕시코는 홈 이점을 살리려고 가장 더운 정오에 경기를 잡았다. 7만 홈 관중이 들어차 한국에 일방적으로 야유를 보내는데 소름 돋을 정도였다"면서도 "막상 뛰어보니 멕시코 선수들도 지쳐서 패스 미스를 남발했다. 공의 속도와 바운드에 빨리 익숙해진 뒤 이를 역으로 이용하면 충분히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43년 전 대표팀은 산소 부족에 대비해 마스크를 쓰고 훈련했다. 신 감독은 "지금 생각하면 과학적이진 않았지만, 그만큼 간절했다"며 웃었다. 이어 "어머니가 싸주신 고추장은 비행기 안에서 기압 때문에 터져버렸다. 대신 현지의 저렴하고 질 좋은 소고기를 열심히 먹으며 체력을 보충했다"는 일화도 덧붙였다.
고지대를 극복하고 또 한 번의 신화에 도전하는 손흥민. 뉴스1
이천수 또한 이란전을 앞두고 치른 지옥 훈련을 떠올렸다. "러닝머신 경사도를 최고치인 12도로 맞추고 12분간 쉬지 않고 빠르게 달리는 극한 훈련을 했다. 허벅지가 터질 것 같았지만 이 악물고 버틴 덕분에 강철 체력과 정신력을 장착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러한 독기는 실전에서 빛을 발해 선제골을 넣은 뒤 원팀으로 버텨내는 승리의 밑거름이 됐다.
이천수는 "이번 월드컵 조 편성이 역대 최고라지만, 고지대 변수 때문에 원정 역사상 가장 힘든 싸움이 될 것"이라며 "일찌감치 미국에 사전 캠프를 차리고 고지대에 적응한 홍명보호의 선택은 '신의 한 수'"라고 평가했다.
"지금 대표팀 선수들은 세계 무대를 누비는 최고 수준입니다.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죠. 수십 년이 흘러도 한국 축구의 승리 공식은 변하지 않습니다. 나라를 대표한다는 사명감과 단단한 정신력을 더한다면, 멕시코 땅에서 또 한 번의 신화를 보게 될 것입니다." 두 레전드의 한결같은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