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문직 비자인 H-1B 신청 수수료를 기존의 1000달러(약 15만원)의 100배인 10만 달러(약 1억 5000만원)로 인상한 조치에 대해 미국 법원이 제동을 걸었다.
지난해 9월 19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비자 수수료 인상 등을 포함한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옆에는 자신의 얼굴이 새겨진 '트럼프 골드 카드'가 보인다. AP=연합뉴스
8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매사추세츠 연방법원은 고액 H-1B 비자 수수료를 취소해 달라며 캘리포니아 등 민주당이 주지사로 있는 20개 주(州) 법무장관이 제기한 소송에서 “10만 달러의 수수료는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은 불법적인 세금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해당 판결을 내린 리오 소로킨 판사는 “10만 달러 지급의 본질과 적용을 살펴보면, 그 이름이 무엇으로 불리든, 세금이라는 점이 드러난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인상한 비자 수수료를 위법이라고 판결했다.
H-1B 비자는 과학·기술·공학·수학(STEM) 분야의 전문 직종에 적용되는 비자로, 추첨을 통한 연간 발급 건수가 8만5000건으로 제한돼 있다. 기본 3년 체류가 허용되며 연장도 가능하고, 영주권도 신청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9월 기업들이 중국·인도인 비중이 높은 H-1B 비자를 활용해 외국 인력을 데려오면서 미국인의 일자리를 뺏고 있다며 비자 수수료를 100배로 올렸다. 그러자 아시아 국가들의 IT(정보통신) 전문 인력 등에 상당 부분 의존해온 미국의 산업계가 “특정 분야의 미국인 인력 부족을 해소할 수 없다”는 불만을 제기했다.
H-1B 비자 신청서. 로이터=연합뉴스
실제 법원에 제출된 자료에 따르면 비자 수수료 인상 이후 H-1B 비자 신청은 대폭 감소해, 지난 2월 15일 기준 10만 달러 수수료를 내고 비자를 신청한 사례는 85건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인의 일자리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영주권을 본국에 돌아가서 신청하도록 한 지침도 오히려 미국 기업들의 반발에 부딪히면서 후퇴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 비자권자는 본국으로 돌아가 영주권을 신청하도록 한 이민국(USCIS)의 지침이 지난달 22일 발표되자 주요 기업과 산업단체에서 백악관과 국토안보부, 국무부, 노동부 등을 상대로 로비를 펼쳤다.
미국 기업들은 외국인 근로자가 본국으로 돌아가 영주권을 신청할 경우 영주권 발급 절차에 시간이 걸릴뿐더러, 귀국이 가능할지도 장담할 수 없게 되면서 안정적인 노동력을 확보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점을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기업과 미국인 노동자를 배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행한 해당 조치가 오히려 미국 기업들을 더 어렵게 한다는 업계의 불만이 폭증하자, 트럼프 행정부 이민국은 기업들과의 긴급 회의를 열고 대부분의 취업 비자에는 영향이 없을 거라고 안심시킨 것으로 전해졌다.
이민국은 미국 언론을 향해서도 “아직 공식 지침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영주권을 신청하는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미국을 떠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9월 백악관에서 '100만 달러는 내면 발급되는 영주권'인 '트럼프 골드 카드'를 들어보이고 있다. AFP=연합뉴스
외국인 노동력에 대한 이민정책을 놓고 이어지는 번복과 후퇴는 트럼프 대통령 지지층 내부의 갈등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지적이 나온다. 강성 지지층은 외국인에 대한 엄격한 이민정책을 요구하지만 외국인 노동력에 크게 의존하는 재계에서는 실용적 접근을 촉구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날 위법 판결을 받은 H-1B에 대한 10만 달러 수수료 부과 대상도 이미 미국 이외 지역에 거주하는 신규 신청자로 적용 범위를 좁혔고, 재계의 강력한 반발 속에 요식업과 농업 부문의 불법체류자 단속도 사실상 중단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