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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받던 리슬링, 세계가 다시 주목하게 만든 남자 [쿠킹]

중앙일보

2026.06.0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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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great wine begins in your head(위대한 와인은 머릿속에서 시작된다).” "
독일 모젤(Mosel)을 대표하는 리슬링 생산자, 에른스트 루젠(Ernst Loosen) 닥터 루젠 대표는 지난 40여 년 동안 세계를 누비며 리슬링의 가치를 알렸다. 미국 워싱턴주와 오리건, 호주, 최근에는 부르고뉴까지 무대를 넓히며 다양한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지만, 그의 출발점은 늘 하나다. 좋은 와인은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산자가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에 대한 명확한 비전에서 시작된다는 것. 지난달 29일, 한국을 찾은 루젠을 만났다. 그는 인터뷰 내내 “먼저 좋은 와인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시작”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40여 년간 세계를 누비며 독일 리슬링의 가치를 알려온 에른스트 루젠 닥터 루젠 대표. 사진 아영FBC

40여 년간 세계를 누비며 독일 리슬링의 가치를 알려온 에른스트 루젠 닥터 루젠 대표. 사진 아영FBC

“좋은 와인을 마셔보고, 배우고, 경험해야 합니다. 그다음에야 와인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에게 와인은 단순한 농산물이 아니다. 생각과 경험, 그리고 철학이 담긴 결과물이다. 그래서 그는 생산자가 스스로 기준을 세우지 못한 채 과거의 방식을 답습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아버지가 이렇게 만들었고, 할아버지가 그렇게 해왔으니까’라는 이유로 무작정 따라 해선 안 된다. 왜 그런 방식으로 와인을 만드는지, 그 본질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이 먼저다”라고 설명했다.

그의 이런 철학은 리슬링에 대한 오랜 신념과도 맞닿아 있다. 리슬링은 독일을 대표하는 백포도 품종이다. 높은 산도와 섬세한 과일 향, 산지의 개성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표현력으로 세계적인 평가를 받는다. 드라이 와인부터 스위트 와인까지 폭넓은 스타일을 만들 수 있으며, 뛰어난 숙성 잠재력 덕분에 세계 최고의 화이트 와인 품종 중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시장의 시선은 차가웠다. 당시 독일 와인은 ‘달고 가볍고 저렴하다’는 이미지에 갇혀 있었고, 리슬링 역시 억울한 오해를 받았다. 루젠 대표는 그 원인으로 1970~90년대 대형 와인 기업들이 생산한 대량생산 독일 와인을 꼽았다.

“리슬링이라는 품종 자체에는 한 번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진짜 문제는 대량생산이 만들어낸 독일 와인의 왜곡된 이미지였죠.” 그는 독일의 젊은 생산자들이 지난 30여 년 동안 이 편견과 싸워왔다고 설명했다. 자신 역시 그 최전선에 있었다. 세계 곳곳을 다니며 소비자와 생산자를 만나고, 독일 리슬링의 진짜 가치를 알리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았다. 실제로 그는 지난 40년 동안 100개국이 넘는 나라를 방문하며 리슬링을 소개해왔다. 그는 “다행히 지금은 사람들이 더 이상 독일 와인을 단지 싸고 단 와인으로만 치부하지 않는다. 우리의 노력이 통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투명함이 매력인 리슬링, 사진은 닥터 루젠의 리슬링으로 달다는 편견을 깬 드라이함이 특징이다. 사진 아영FBC

투명함이 매력인 리슬링, 사진은 닥터 루젠의 리슬링으로 달다는 편견을 깬 드라이함이 특징이다. 사진 아영FBC


그가 생각하는 리슬링의 가장 큰 매력은 투명함이다. 특히 모젤 리슬링은 특유의 순수함과 청량감으로 사랑받는다.

“잘 익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때를 생각해보세”요. 단맛도 있지만 산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상쾌하죠. 모젤 리슬링도 그렇습니다.”
그는 모젤 리슬링의 순수함을 여러 번 강조했다. 오크 향이나 강한 탄닌에 가려지지 않고 품종과 산지의 개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정의하는 ‘좋은 와인의 조건’은 무엇일까. 루젠은 세 가지 요소를 꼽았다. 훌륭한 기후, 축복받은 토양, 그리고 뛰어난 와인메이커다. 그는 “아무리 땅과 날씨가 좋아 최고의 포도가 열릴지라도, 생산자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와인을 완전히 망쳐버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대중이 와인을 지나치게 어렵거나 엄숙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덧붙였다.
200년 넘는 역사를 이어온 독일 모젤의 닥터 루젠 와이너리. 사진 닥터루젠 와이너리

200년 넘는 역사를 이어온 독일 모젤의 닥터 루젠 와이너리. 사진 닥터루젠 와이너리

“사람들은 종종 와인 전문가가 되기 전까지는 자신의 취향이나 의견을 말하기 조심스러워합니다. 하지만 와인은 정답을 맞춰야 하는 시험이 아닙니다. 내 입에 맞고 좋아하면 좋은 와인이고, 싫으면 싫은 와인인 겁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그의 삶 자체에서 비롯됐다. 사실 루젠이 처음부터 와인메이커를 꿈꾼 것은 아니다. 그는 한때 고고학자가 되고 싶었다. 포도밭보다 로마 시대 유적에 더 관심이 많았고, 실제로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아버지의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200년을 이어온 가문의 와이너리를 이어받아야 하는 상황이 찾아왔고, 결국 삶의 방향을 바꾸게 됐다.

와이너리를 물려받은 뒤 맞닥뜨린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가 경영을 맡았을 당시 닥터 루젠은 사실상 파산 직전 상태였다. 빚이 많았고, 은행은 쉽게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 결국 어머니가 대출 보증을 섰다. 그렇게 와이너리를 맡은 그는 1987년 포도 선별을 강화하고 품질 기준을 높이는 등 대대적인 변화를 추진했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같은 방식으로 일해온 직원들은 이를 반기지 않았다. 수확철을 앞두고 직원들은 집단으로 회사를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직원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후계자가 나타나 일을 망치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당시 함께 있던 친구이자 현재까지 파트너로 일하고 있는 베르니 슈그는 뜻밖의 조언을 건넸다. 그들이 떠나겠다면 떠나게 두자는 것이었다. 결국 상당수 직원들이 회사를 떠났고, 루젠은 사실상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이 사건을 인생의 전환점으로 기억한다. 그해는 날씨마저 좋지 않았다. 다른 생산자들이 서둘러 수확을 마쳤지만 루젠은 기다렸다. 그리고 11월 초 예상치 못한 좋은 날씨가 찾아왔다. 늦은 수확 덕분에 와인은 훌륭하게 완성됐다. 그는 당시를 “운도 있었지만, 배운 것이 많았던 시기”라고 말했다.

독일 모젤의 와이너리에서 에르데너 프렐라트 리슬링을 선보이는 에른스트 루젠 닥터 루젠 대표. 사진 닥터루젠 와이너리

독일 모젤의 와이너리에서 에르데너 프렐라트 리슬링을 선보이는 에른스트 루젠 닥터 루젠 대표. 사진 닥터루젠 와이너리

하지만 성공을 자축할 여유조차 없었다.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후 와인 품질로 정면 돌파하며 양조장에 쌓인 모든 빚을 청산했다.그리고 끝내 닥터 루젠을 세계 최정상의 리슬링 하우스로 키워냈다. 하지만 성공 이후에도 그의 호기심은 멈추지 않았다. 사실 그의 이러한 배움을 향한 열정은 젊은 시절부터 남달랐다. 젊은 시절 그는 지인인 영국 와인 전문지 디캔터 기자의 운전기사 역할을 자처하며 유럽 곳곳의 생산자들을 찾아다녔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심부름처럼 보였지만, 그에게는 최고의 학교였다.

루젠 대표는“화이트 와인 생산자뿐 아니라 레드 와인 생산자에게서도 배울 점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다른 생산자에게서 본 양조 기법을 자신의 리슬링에 적용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했다. 레드 와인 생산자들이 사용하던 ‘풀 클러스터 프레싱(Whole Cluster Pressing)’ 방식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의 양조에도 응용해본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품종과 지역이 달라도 배울 점은 어디에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 같은 호기심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는 미국 워싱턴주의 ‘에로이카(Eroica)’, 오리건의 ‘아파시오나타(Appassionata)’, 호주의 ‘올타 올타(Wolta Wolta)’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선보왔다. 최근에는 오랜 꿈이었던 부르고뉴 프로젝트에도 뛰어들었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묻자 그는 망설임 없이 “열정”이라고 답했다. 그는 “먼저 만들고 싶은 와인에 대한 그림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흔을 앞둔 요즘도 그는 여전히 새로운 와인을 구상하고, 새로운 생산자를 만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험한다. 인터뷰 내내 그는 여러 번 “배움”을 이야기했다. 좋은 와인을 마셔야 하고, 다른 생산자들에게 배워야 하며, 무엇보다 자신이 만들고 싶은 와인을 먼저 머릿속에 그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40년 넘게 리슬링을 만들고도 여전히 새로운 프로젝트를 멈추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위대한 와인은 머릿속에서 시작됩니다.”

송정 기자 [email protected]



송정([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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