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내가 조선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어떻게 양육되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조선 시대에 우리 집은 천민은 아니었을 것이다. 중인이었다면, 그러한 집안의 막내이자 딸인 나에게 사회는 교육의 문을 닫았을 것 같고, 집에서도 예의범절 교육 정도로 만족하였을 수도 있다. 다행히 나는 해방 이후 태어났다. 딸을 차별하던 유교 풍습은 많이 사라졌지만 그 뿌리까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던 때였다.
평안북도 출신의 부모님은 지리적 영향으로 서양 문화와 남녀평등의 철학, 그리고 기독교 정신을 일찍 접할 수 있었다. 자녀 교육도 딸, 아들 구별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여성을 존중하는 서양 문화의 장점을 본받아 실천하셨다. 덕분에 나는 한국에서 성장할 때나, 미국에서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면서도 늘 당당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는 의무교육 제도가 정착되면서 여성도 교육받을 기회가 생겼고, 그 결과 많은 여성 인재들이 배출됐다. 딸을 미국이나 유럽으로 유학 보낸 집도 많았던 것으로 안다. 중·고교 모두 여학교를 다닌 나는 올해 고교 졸업 60주년 재상봉, 숙명여자대학 창학 120주년, 이화여대 창립 140주년 행사 등에 참석하면서 많은 한국 여성이 한국은 물론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분야의 전문인으로 활약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국 여성 교육의 근대적 출발은 당시로써는 기적에 가까운 변화였다. 기독교 선교 목적으로 조선에 온 선교사들은 처음엔 천민 집안의 딸이나 버려진 여자아이들을 돌보는 자선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기독교 전파와 여성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세웠다. 놀라운 것은 그들의 활동이 교육에 그치지 않고 보호받지 못하는 여성들을 치료해 주고, 거두어 주는 ‘보구녀관(普救女館)’이라는 의료기관도 1887년에 설립했다는 것이다. ‘보구녀관’이라는 이름은 고종황제가 하사한 것이라고 한다. ‘여성을 널리 구하고 보살피는 기관’이라는 뜻이다. 이후 1898년에는 평양에 감리교 여성병원인 ‘광혜여원’이 설립되었다. 조선인 여의사와 간호사가 배출되기 시작했다.
한국 여성 교육의 시작은 기적이라 생각된다. 이화학당이 시초로, 지금부터 140년 전 미국 북 감리교 선교사이었던 메리 스크랜튼 여사가 자택에서 시작한 학교다. 첫 번째로 학생이 되겠다고 찾아온 여인은 관료의 소실이었다고 하는데, 입학 3개월 후 병으로 자퇴했다고 한다. 두 번째 학생은 13살 꽃님이, 그 다음이 콜레라에 걸려 버려졌던 별단이, 그리고 한국 여성 최초로 미국 볼티모어에 유학 여의사가 된 김점동, 박 에스터가 있었다. (참고: 한국기독일보, 2021년 6월 10일 자, [한국교회사] 개혁신앙 28호, 고신대 역사신학 이상규 교수)
이화여대 부속 병원 방문에서는 조선시대의 계급제도와 여성 천대에 관한 역사적 자료를 볼 기회가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천민의 딸로 태어나 종으로 살면서 매 맞고, 굶고, 급기야는 길에 버려진 어린아이의 사연이었다. 사진 속 왜소한 모습의 그 소녀는 동상으로 두 손과 다리 하나를 잃고 목발에 의지하고 있었다. 다행히 선교사들의 보살핌으로 살아난 소녀는 선교사들과 사는 것이 ‘인생 최대의 행복’이라고 말했다 한다.
숙명여자대학과 이화여자대학이 한국 여성 교육 발전에 이바지한 바는 크다. 많은 졸업생이 과학, 기술, 수학, 의학, 문학, 법학 등 많은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화여대 의과대학에는 부속 병원 두 개가 있다. 7년 전에 완공한 두 번째 병원을 이번에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인기 TV드라마 ‘슬기로운 의사 생활’과 ‘중증외상센터’의 촬영 장소로 사용돼 환자와 의사들의 삶을 보여줬던 병원이다.
19세기 말 ‘보구녀관’에서 시작된 여성 의료와 교육의 정신은 오늘날 세계적 수준의 병원과 대학의 탄생으로 결실을 보고 있다. 고종이 하사한 ‘보구녀관’이라는 이름과 이 의료기관을 설립한 메리 스크랜튼 여사의 헌신은 한국 여성 교육과 의료 발전의 역사 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