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헝가리 페치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왼쪽)이 환하게 웃는 모습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감옥에 갇힌 이미지를 합성한 광고판이 걸려 있다. AFP=연합뉴스
#1.지난 3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가 화염에 휩싸였다. 우크라이나 드론이 정유 시설과 해군 기지 등을 공격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야심차게 연 ‘러시아판 다보스 포럼’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제경제포럼 개막일이었다. 드론 위협에 러시아는 공항 운영과 모바일 인터넷 서비스를 중단했다.
지난 3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으로 생긴 폭발로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있다. AP=연합뉴스
#2. “탱크도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도 보이지 않았다.”
지난달 9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2차 세계대전 승리 81주년 열병식을 참관한 영국 BBC 기자의 평가다. 러시아가 열병식에서 첨단 무기를 선보이지 않은 건 20년만이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수도 모스크바조차 우크라이나 드론에 안전하지 않아 행사를 축소해야 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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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반만에 러시아보다 땅 더 빼앗았다
지난 4일 우크라이나군이 도네츠크 전선에서 러시아군을 향해 다연장 로켓(MRLS) BM-21 그라드를 발사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전쟁 판도가 변하고 있다. 미국 싱크탱크 전쟁연구소(ISW)에 따르면 지난 4~5월 우크라이나는 403㎢의 영토를 되찾았다. 같은 기간 러시아가 뺏은 땅을 제외한 순수 회복 면적이다.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의 0.4% 수준이지만,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보다 더 많은 땅을 차지한 건 대반격을 벌이던 2023년 10월 이후 2년 반 만에 처음이라고 AFP통신이 전했다.
반면 러시아군 기세는 올해 들어 급격히 꺾였다. 지난 4월까지 하루 평균 진격 속도는 2.9㎢로 지난해 같은 시기(9.76㎢)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병력도 줄고 있다. ISW에 따르면 2025년 12월 이후 사망과 부상으로 전선을 이탈한 러시아군이 신규 모집 병력을 앞질렀다. 러시아의 사상자는 최근 월 3만5000명으로 늘었다. 누적 인명 손실은 110만~150만명(사망 28만~51만8000명)으로 추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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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월만 해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당신은 카드가 없다”며 평화협정에 서명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전선에선 러시아에 돈바스(도네츠크·루한스크)를 내줄 위기에 처했다.
젤렌스키에게 반전의 기회를 준 카드는 드론이었다. 대규모 병력을 희생해 조금씩 진격하는 러시아의 ‘고기분쇄식’ 전술을 막아내고 있다. 무대는 양국이 참호를 파고 대치하는 1200㎞ 길이 동부전선이다. 폭 50㎞의 살상지대 ‘킬 존’에서 러시아 탱크·장갑차가 맥을 못 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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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까지 늘어난 킬 존…크림반도 보급 차단
우크라이나군 병사들이 지난달 20일 하르키우 전선에서 러시아군을 향해 드론을 발사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병력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드론 공격에 집중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올해부턴 킬 존이 150~200㎞로 넓어졌다. 우크라이나 드론의 타격 범위가 늘어나면서다. 크림반도 등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 전체가 킬 존이 됐다. 피해가 속출하면서 러시아는 이 지역에 물자를 보급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
더 두려운 건 러시아 본토를 향하는 사거리 1500㎞ 이상의 장거리 드론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러시아 국토의 4분의 1, 인구 70%가 공격 범위”라고 평가했다. 정유·수출 시설을 때려 러시아의 돈줄을 죄고, 도심 한복판을 타격해 러시아 국민에 전쟁의 심각성을 일깨운다는 게 우크라이나 전략이다. 푸틴이 어쩔 수 없이 열병식 행사를 축소해야 했던 이유다.
전쟁 초기 드론을 전량 수입했던 우크라이나는 2024년부터 사실상 전량을 자체 생산한다. 부품 등 공급망도 완비돼 있다. 계기는 2023년 국가 방위기술 플랫폼 브레이브원 출범이다. 국방부·총참모부·디지털전환부 등 6개 정부기관이 공동 운영하는 곳으로, 기업의 드론 기술 개발 지원과 신제품 시험·실전 투입이 원스톱으로 이뤄진다.
정근영 디자이너
우크라이나에선 인공지능(AI) 기반 드론 개발 기업이 200여개에 이른다. 이를 통해 전장에서 ‘피로 얻은’ 데이터를 실시간 업데이트해 드론을 끊임없이 개량하고 있다. 미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은 “2024년 말부터 우크라이나는 중·장거리 공격에 특화된 드론을 개발했다”며 “AI와 위성 인터넷 스타링크로 표적을 탐지, 실시간 궤도 조정을 한다”고 평가했다.
지난달 15일 우크라이나군 드론병이 우크라이나 모처에 위치한 드론 조종실에서 컨트롤러를 이용해 드론을 원격으로 조종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가성비도 높다. 대당 제작 비용이 500달러(약 78만원)인 1인칭 시점(FPV) 드론이 수백만 달러의 러시아 탱크를 파괴하고 있다. 광섬유로 연결된 유선 드론이라 재밍(전파방해)도 안 통한다. 생산량도 연간 400만대에 이른다. 이란 샤헤드 드론을 개량한 러시아 드론 ‘게란’(대당 약 3만5000달러)도 우크라이나가 3D 프린팅으로 만든 1000달러짜리 요격 드론에 무력화되고 있다.
신속 타격 시스템도 구축했다. 우크라이나 드론병은 미 위성업체 밴터의 영상을 휴대전화에 실시간으로 받아 드론 공격에 쓴다. 표적 탐지부터 타격까지 시간이 최대 90% 줄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전했다.
지난달 24일 우크라이나 하르키우 지역에서 우크라이나군 병사가 무장 로봇을 점검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상에선 카메라와 기관총·폭탄을 장착한 로봇이 활약한다. 소리 없이 접근해 살상하는 모습에 러시아군에선 ‘조용한 죽음’으로 불린다. 병력의 열세를 드론과 로봇이 효과적으로 메우고 있는 셈이다. 지난 4월엔 드론과 로봇만으로 러시아 진지를 점령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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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전쟁에 놀란 국제사회…우크라 손잡기 안간힘
지난 4월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왼쪽)이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와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국제사회 위상도 변하고 있다. 미국-이란 전쟁에서 이란제 드론이 걸프 국가 미군 기지와 인프라를 타격하면서다. WSJ은 “우크라이나는 드론 실전 경험과 혁신적 기술로 중동 전쟁 이후 ‘안보 수혜국’에서 ‘안보 제공국’이 됐다”고 평가했다.
실제 우크라이나는 ‘드론 외교’를 전방위로 펼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아랍에미리트 등과 방위 협정을 맺었다. 미국은 사우디 프린스 술탄 공군기지에 우크라이나 드론 통제 플랫폼을 배치했다. 댄 드리스콜 미 육군장관은 최근 의회에 “우크라이나의 지휘 시스템 ‘델타’는 미 플랫폼을 능가한다”고 말했다. 델타는 AI로 드론·센서·위성을 실시간 통합 지휘한다. 이를 벤치마킹해 미군은 지난 1일 방산업체와 네트워크 통합 훈련을 벌였다. 일본 업체 테라 드론도 지난 3월 우크라이나 업체와 공동 개발한 요격 드론 ‘테라 A1’을 공개했다.
유럽도 우크라이나 버팀목을 자처하고 있다. 독일 싱크탱크 킬 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트럼프 행정부 출범 후 미국은 우크라이나 재정 지원을 전년도보다 99% 줄였지만, 부족분은 유럽이 모두 메웠다. 헝가리 반대로 막혔던 유럽연합(EU)의 900억 유로(약 153조 원) 규모 구제금융도 4월부터 재개됐다. 같은 달 총선에서 헝가리 정상이 친서방 성향 머저르 페테르 총리로 바뀌면서다.
애틀랜틱카운슬은 “러시아 침공 방지를 최우선 안보로 생각하는 유럽엔 우크라이나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마르크 뤼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이 지난 3일 우크라이나를 방문하고, 9일 북유럽·발트 8개국 정상회의에서 정상들이 젤렌스키와 드론 관련 협정 체결에 힘쓴 것도 우크라이나의 바뀐 위상을 보여준다.
지난달 9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2차 세계대전 승리 81주년 열병식에서 러시아 군인들이 도열해 있다. 우크라이나의 드론 위협을 우려해 규모를 예년보다 크게 축소해 열었다. AP=연합뉴스
자신감을 찾은 젤렌스키는 지난 4일 편지로 푸틴에 종전 담판을 제안했다. 프랑스 르몽드는 “푸틴이 거절할 걸 알면서도 전쟁을 힘들어하는 러시아 엘리트를 겨냥한 압박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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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미사일 전력 무시 못 해
한 우크라이나 여성이 지난 8일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무너진 수도 키이우 오흐마트디트 어린이병원에서 아이를 업은 채 대피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하지만 러시아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러시아는 오레시니크, 치르콘 등 극초음속 탄도미사일을 동원해 키이우 등을 공습하고 있다. 이를 막을 무기는 미국산 ‘패트리엇’ 이 유일하지만 이란 전쟁 여파로 부족한 상황이다. 젤렌스키는 미국에 패트리엇 추가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영국·프랑스·독일 등 유럽에 패트리엇의 대안을 개발해 달라고 촉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