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뉴캐슬 유나이티드 FC의 홈구장 세인트 제임스 파크의 비대칭 외관. 도심 한복판이라는 부지의 한계 속에서 증축을 거듭하며 만들어진 독특한 형태다. [AFP=연합뉴스]
손꼽아 기다리던 북중미 월드컵이 시작됐다. 우리 건축 사무실에서 일하는 신소유 실장과 이야기를 나누다 충격을 받았다. 세계가 들썩이는 이 이벤트를 신 실장은 언제 열리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2002년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함께 응원하던 때를 떠올리면 정말 많은 것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 한켠에는 시민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축구만 생각하는 도시가 있다.
뉴캐슬 유나이티드 FC(이하 뉴캐슬)의 유니폼을 입은 행렬과 마주친 곳은 도심 한복판이었다. 이곳은 영국 북부의 도시, 뉴캐슬 어폰 타인(Newcastle upon Tyne·이하 뉴캐슬). 영국에서, 그것도 홈 경기가 열리는 날 축구 팬을 보는 일이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일까 싶겠지만, 이곳의 풍경은 유독 특별했다. 수많은 인파가 일정한 방향을 향해 마치 행군하듯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흑백 줄무늬 유니폼 덕분에 거대한 체크 패턴이 도시를 가로지르는 듯했다. 호기심에 그 행렬을 따라가 보았다. 도심에서 출발한 지 불과 10여 분, 저 멀리 홈구장인 세인트 제임스 파크(St.James’ Park)가 보였다.
[일러스트 조성익]
현대식 경기장은 대개 도시 외곽에 지어지기 마련인데, 세인트 제임스 파크는 전 세계 주요 경기장 중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도심 상업 지구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경기장 자체보다도 수만 명의 팬들이 구장으로 걸어가는 길이었다. 골목에 자리 잡은 팬들이 맥주를 마시다 길을 지나가는 팬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곳곳에는 피시 앤 칩스 냄새와 떠들썩한 환호가 뒤섞여 있었고 10여 분의 행군 길에 늘어선 펍과 빵집, 식당은 팬들로 북적였다. 경기장 앞에는 뉴캐슬 팬들의 성지이자 전설적인 로컬 펍 ‘더 스트로베리(The Strawberry)’가 있다. 건물 상단에 지역 맥주인 ‘뉴캐슬 브라운 에일’의 파란 별 로고가 보이면 한 잔 하지 않고는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이 경기장은 도심과 가까운 입지 덕분에 도시 곳곳으로 사람을 흩뿌리는 심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매치 데이의 뉴캐슬 거리. 오른쪽에 있는 하얀 건물이 뉴캐슬 팬들의 성지이자 전설적인 로컬 펍 ‘더 스트로베리’다. [사진 the MAG]
‘성당’ 애칭…경기 보러 갈 때 “성당 간다”
잠시 세인트 제임스 파크의 외관을 감상해보자. 백색 강철 기둥과 지붕이 어우러져 첫 인상은 꽤 현대적이다. 하지만 반복되는 기둥을 가만히 올려다보면 중세의 고딕 성당이 연상되기도 한다. 실제로 뉴캐슬 시민들이 “언덕 위 대성당에 간다”고 하면 기도를 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경기를 보러 가는 것을 의미한다. 열정적이기로 유명한 팬들이 이 경기장에 붙여준 애칭이 바로 ‘성당’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마음속에 이곳은 종교 시설이나 다름없는 숭배의 대상이긴 하지만 말이다.
외곽을 따라 한 바퀴 돌아보니 건축물로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극단적인 비대칭 형태였다. 여기에는 입지와 맞물린 이유가 있다. 세인트 제임스 파크는 1892년부터 무려 130여 년 동안 한자리에서 팬들을 맞이한 경기장이다. 그사이 좌석 수를 늘리기 위해 경기장 이전이 여러 차례 고려됐지만 추억을 쌓아온 팬들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차선책으로 전면 신축 대신, 일부
2층 스탠드를 덧대는 방식으로만 증축했다. 도심의 제한된 부지 안에서 5만 명 이상의 관중석을 차츰 확보해 나가다 보니 북쪽과 서쪽 스탠드만 기형적으로 높게 치솟게 된 것이다.
그런데 건축가의 눈으로 보기에 오히려 이 점이 매력 포인트였다. 매끈하고 대칭적인 형태를 자랑하는 것이 신축 경기장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마치 거대한 파도가 도시를 향해 쏟아질 듯 솟구친 이 아슬아슬한 실루엣은 이 경기장이 주변 도시 조직과 얼마나 치열하게 타협하며 성장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동네에 몸을 구겨 넣은 거인 같달까. 오히려 이점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도심에 위치한 운동 시설은 그 자체로 경제적 가치가 크다. 경기를 보는 3시간뿐 아니라, 경기 전 모여 응원 도구를 사고 기대감을 나누는 시간, 경기가 끝난 뒤 뒤풀이를 하는 시간까지 합치면 관객들은 하루 반나절 이상을 경기장 안팎에서 보낸다. 체류 시간이 길고 연계 활동이 활발히 일어나는, 귀한 상업 시설인 셈이다.
도시 외곽의 경기장이라면 사람들은 경기 후 차를 몰고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다. 체류와 연계의 힘은 주차장에서 증발해버린다. 반면 도심형 경기장은 경기의 에너지가 주변 보행로와 상업시설로 골고루 퍼진다. 사람을 한 공간에 가둬 독점하지 않고, 기존 골목길과 유기적으로 이어지게 한다.
이런 상업적 잠재력 때문에 도심형 경기장이 가진 경제성을 극대화하려는 시도도 있다. 일본의 미쓰이 부동산은 도쿄 돔을 인수한 뒤, 야구장 주변 지하철역부터 경기장까지 이어지는 길을 거대한 상업 공간으로 바꾸는 개조를 진행했다. 경기장을 고립된 목적지가 아니라 도시의 연장선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수만 명의 왕성한 소비력을 경기장이라는 찻잔 속 태풍에 머물게 할 것인가, 아니면 도시 전체에 골고루 뿌려지는 비가 되게 할 것인가. 도심형 경기장은 거대 자본이 모든 것을 독점하지 않고 주변 상점과 지갑이 함께 나눠 갖는 ‘상업의 민주주의’를 지켜낸다.
사회 통합의 장소로서 경기장. 그 현상은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한국 프로야구 리그 관중은 1200만 명을 넘어섰다. 그 대상도 일부 중년 남성에서 여성과 어린이로 급격히 확산되고 있다. 가족, 1인 가구, 연인, 군인, 어린이 등 세대와 성별을 넘어선 사람들이 하나의 장소에 모이는 곳이 도시의 경기장이다.
시민들이 여가를 즐기고 있는 창원 NC 파크 앞 풍경. [사진 조성익]
우리나라 경기장을 입지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도심 접근성이 가장 뛰어난 곳 중 하나는 창원 NC 파크다. 경기가 열리는 날, 마산역은 다른 도시에서 원정 온 팬들로 북적였다. 이들과 함께 버스를 탔는데 불과 15분 만에 경기장에 도착했다. 완벽한 도심형 경기장이다. 경기장에서 길만 건너면 ‘마산 야구의 거리’로 이어지는데 냉삼겹살, 옛날 손짜장, 돼지국밥을 잘 하는 노포들이 골목 길을 철저히 수비하고 있어서 마음이 든든하다. 경기장 코 앞에는 고층 주거 건물과 마트가 들어와 있는데 어찌나 가까운지 집 안 거실에서 경기가 보일 것 같다. 열성 야구팬이라면 저 아파트를 탐내지 않을까?
당일 경기는 9회까지 아슬아슬 했다. 오랜만에 보는 명 경기여서 재미있었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경기장 밖의 풍경이었다. 경기장 앞에서는 유니폼을 갖춰 입은 어린이들이 캐치볼을 하고 있었다. 경기장 입구에 널찍한 잔디 밭을 만들어둔 덕이다. 광장에는 십대 여자 아이들이 경기장 응원가에 맞춰 춤 연습을 하고 있다. NC 파크를 개방형 경기장으로 설계한 덕이다. 경기장을 높은 담으로 둘러싸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공원과 상점을 향해 담을 낮추고 경기장의 응원 열기가 자연스럽게 도시로 흘러나오게 한 것이다.
시민 여가시간 담아내는 공간의 중요성 상업적 이익도 중요하지만 시민의 건강한 휴식이라는 측면에서도 경기장은 중요하다. 몇 년 전 한 정치인이 “저녁이 있는 삶”을 공약한 적이 있다. 노동 시간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AI 시대에는 조만간 “저녁이 너무 긴 삶”이 문제로 떠오를지 모른다. 시민의 여가 시간을 담아낼 공간을 늘려가는 것, 미래의 정치인과 도시계획가가 마주할 숙제다.
이런 측면에서 스포츠 관람은 비교적 긴 시간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채워주는 프로그램이다. 각자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극단적인 개인화 시대에 수만 명이 하나의 경험을 하게 해주는 이벤트가 도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기적에 가깝다. 같은 색깔의 옷을 입고 한목소리로 노래하며 강한 소속감과 연대감을 느끼게 해주니 말이다.
어쩌면 뉴캐슬 팬들이 붙인 ‘성당’이라는 애칭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과거 종교나 지역 커뮤니티가 담당하던 심리적 구심점이 옅어진 시대, 스포츠 스타디움은 현대의 종교 시설이자 각 계층의 사람들을 섞어주는 도시 광장 역할을 한다. 스타디움이 가진 도시 잠재력을 탐구하는 ‘스타디움 어버니즘(Stadium Urbanism)’을 깊이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 그건 그렇고, 상업 민주주의와 사회 통합을 위해서 다음 대한민국 경기는 신 실장과 친구들을 모아 근처 맥주 집에서 함께 응원해야겠다.
조성익 건축가. 홍익대 교수이자 TRU 건축사무소의 대표 건축가다. 맹그로브 숭인 코리빙으로 한국 건축문화대상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공간과 삶, 그리고 사람에 대한 애정으로 책 『건축가의 공간 일기』를 출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