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르 갈레노에이 이란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오른쪽)과 주장 메흐디 타레미가 지난 15일(한국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뉴질랜드와의 첫 경기를 앞두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16일(한국시간) 오전 10시 미국 로스앤젤레스 스타디움에서 킥오프 호각이 울리면 이란 선수들은 전율할 것이다. 월드컵을 향해 걸어온 4년이 일종의 생존기였기 때문이다. 자국 정부의 감시, 전쟁, 외교적 냉대라는 삼중고를 버틴 끝에 마침내 서게 된 무대다.
고난의 시작은 4년 전 카타르 월드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고국은 ‘히잡 미착용 여대생 의문사 사건’으로 반정부 시위의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잉글랜드와의 1차전, 이란 선수들은 경기장에 울려 퍼지는 국가를 부르지 않았다. 입을 닫고, 눈을 내리깔았다. 외침을 삼킨 침묵의 저항이었다.
대가는 가혹했다. 이란 혁명수비대(IRGC)는 “귀국 후 가족들이 고문을 받거나 감금될 것”이라고 협박했다. 불안감 속에 카타르 월드컵을 마친 선수들은 시위가 잦아든 뒤에야 겨우 축구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이란은 지난해 3월 아시아 예선 조 1위로 일찌감치 본선행을 확정했다. 지난해 12월 조 추첨에서 벨기에·이집트·뉴질랜드와 함께 G조에 편성돼 미국에서 조별리그 전 경기를 치르는 일정을 받아 들었을 때만 해도, 비극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
이란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지난 15일(한국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리는 뉴질랜드와의 첫 경기를 앞두고 경기장 상태를 점검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진짜 재앙은 올해 2월에 터졌다. 이란과 월드컵 공동 개최국인 미국 사이에 전면적인 군사 충돌이 벌어진 것이다. 전쟁 상대국 땅에서 경기를 치러야 하는 황당하고 위험천만한 상황이 연출됐다. 메흐디 타즈 이란축구협회장이 “더 이상 월드컵 참가는 기대할 수 없다”며 불참을 시사하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란이 나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맞받아쳤다.
이란 정부는 FIFA에 “조별리그를 미국이 아닌 멕시코에서 치르게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자 아예 ‘적대국 원정 경기 금지령’을 내렸다. 4월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특사 측에서 “이란을 탈락시키고 이탈리아를 대타로 출전시키자”는 황당한 교체설까지 흘러나왔다. 지안니 인판티노 FIFA 회장이 정치적 이유로 출전국을 바꿀 수 없다”고 선을 긋고 끈질기게 중재한 끝에야, 이란은 4월 말 간신히 복귀를 선언했다.
출전은 확정됐지만 미국의 ‘외교적 보복’이 선수단의 발목을 잡았다. 미국이 비자 발급을 고의로 지연하면서 당초 예정했던 애리조나 베이스캠프를 전면 취소하고, 국경 너머 멕시코 티후아나로 캠프를 긴급 옮겨야 했다.
미국이 최종 승인한 비자는 세계 축구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1박 체류 제한 비자’였다. 입국한 순간부터 딱 1박 2일만 미국 영토에 머물 수 있는 통제 조치다. 이란은 경기 전날 간신히 미국 땅을 밟아 공식 기자회견과 단 한 차례 적응 훈련을 마친 뒤, 경기가 끝나자마자 쫓기듯 다시 티후아나로 돌아가야 한다.
볼파즐 파산디데 멕시코 주재 이란대사는 “장거리 비행과 촉박한 이동으로 컨디션이 망가지고 있다”며 맹비난했다. 타즈 협회장을 비롯한 선수단 수뇌부 6명은 아예 입국 자체가 거부됐다. 미 정부 관계자는 “테러리스트 잠입을 막기 위한 조치”라며 이란 대표팀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했다.
이란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자들이 지난 14일(한국시간) 이란과 뉴질랜드 경기가 열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로스(LA) 경기장 밖에서 피켓(플래카드)을 들고 이란 반정부 시위를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공교롭게도 경기 전날, 미국과 이란은 106일간의 전쟁을 끝내고 극적으로 종전에 합의했다. 이란 주장 메흐디 타레미는 “남들은 월드컵을 앞두고 설레지만, 우리는 비자 문제와 유랑 생활로 극도의 긴장과 피로만 느꼈다”고 했다. 아미르 갈레노에이 감독도 “이기든 지든 마음이 너무나 착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고난은 경기 중에도 이어질 공산이 크다. 이란계 미국인들이 대거 거주하는 LA에서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예고돼 있다. 이란 스포츠부는 “경기장에 승인되지 않은 깃발이 걸리거나 반정부 구호가 나오면 즉각 경기를 중단하라”고 지시해 뒀다. 초록색 그라운드 자체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정치적 화약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