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서른여덟이었다. 인쇄업체에서 일하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의자 끝에 걸터앉은 그는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 닫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스스로도 정리되지 않는 듯했다.
얼마 전 그는 회사에서 밀려났다. 능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이유였다. 십년 가까이 같은 일을 해온 베테랑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업무 속도가 눈에 띄게 떨어졌다. 오전 내내 붙잡고 있어도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거래처 이름이 금세 떠오르지 않았고, 회의 시간에는 멍하니 앉아 있는 날이 많아졌다. 마감이 다가올수록 마음만 조급했다. 퇴근할 때면 녹초가 돼 있었다.
번아웃이라고 생각했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가장이었다. 잠을 못 자서 그런가 보다 했다. 동료들도 “요즘 많이 힘드냐”고 물을 뿐이었다.
하지만 실수는 점점 늘어났다. 결국 회사를 잘렸다. 그런데 그는 다음 날도 회사로 향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서른 번, 마흔 번씩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했다.
그가 가천대 길병원 박기형 (57) 신경과 교수의 진료실을 찾아온 건 그즈음이었다. 검사 결과는 ‘전두측두 치매’. 전두엽이 무너지면서 판단력과 충동 조절 능력을 잃어가는 병이었다. 박 교수는 그때를 떠올리며 잠시 말을 멈춘 뒤 조용히 말했다.
" 지금도 기억이 나요. 아기가 정말 어렸습니다. 한창 돈을 벌어야 할 나이였고요. "
박기형 교수가 가천대 길병원 강당에서 뉴스페어링과 인터뷰 하고 있다. 박 교수는 올해 4월 대한치매학회 신임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대한치매학회는 국내 치매 분야 최대 규모의 전문 학술단체다.
특수한 사례일까. 그렇지 않다. 65세 이전에 발병하는 ‘초로기 치매’는 전체 치매 약 10%를 차지한다.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우울증, 스트레스, 번아웃 등 다른 병인 줄 알았다는 것. 그사이 뇌는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
오늘 〈뉴스페어링〉에선 박기형 교수가 겪었던 믿기 어려운 초로기 치매의 최후, 가장 효과적인 예방법 등을 다룬다. 노인성 치매와 전혀 다른 증상도 함께 살폈다. 박 교수가
20년째 실천하고 있는 단 하나의 식단원칙, 그가 추천하는 보조제, 최근 진단·치료 트렌드까지 모두 담았다.
「
기억력 멀쩡한데 치매, 놓치기 쉬운 증상
」
Q : 흔히 치매는 노인의 병이라고 생각하는데, 40·50대 환자가 이렇게 많은 줄 몰랐습니다.
A : 생각보다 훨씬 많습니다. 실제 진료실에선 흔한 일이에요. 목사가 되려던 신학 대학원생, 현직 간호사, 인테리어 디자이너, 변호사, 의사, 선생님, 일반 직장인 등 직업도 학력도 다양하죠.
Q : 초로기 치매는 노년기 치매와 진행 양상이 다른가요?
A : 가장 안타까운 게 초로기 치매는 노년기 치매보다 예후가 훨씬 나쁩니다. 노년기 치매는 10년 이상 서서히 진행되는 경우가 많은데, 젊은 분들은 달라요. 4~5년이면 가족도 못 알아보는 단계까지 가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경제활동을 해야 하는 나이에 그렇게 되면 환자 한 명이 아니라 가정 전체가 무너지죠.
Q : 증상도 단순히 ‘기억력 저하’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쉽게 눈치채기 어렵다고 하던데, 초로기 치매의 증상은 무엇인가요?
A : 네. 노인성 치매는 기억력이 떨어지지만, 초로기 치매는 그렇지 않아요. 환자의 25%는 기억력이 정상이에요. 건망증도 없죠.
대신 길을 잃고, 판단이 흐려지고, 직장에서 능률이 뚝 떨어져요. 그렇다 보면 환자들이
우울감에 빠지고 감정 기복이 커져요. 스스로를 탓하기도 하죠. 그래서 ‘번아웃인가 보다’ ‘우울증인가 보다’ 하고 정신건강의학과를 먼저 찾는 경우가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