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겠다는 ‘말’을 얻었고, 이란은 원유 금수 조치 면제라는 미국의 ‘행동’을 얻어냈다. 17일(현지시간) 공개된 ‘트럼프 합의’(Trump Deal)는 불법적으로 개발한 핵을 손에 쥔 채로도 반대급부를 받아낼 수 있다는 ‘선(先) 보상 후(後) 핵 폐기’의 나쁜 선례를 남겼다는 지적이다.
트럼프는 이날 이란과의 종전 양해각서(MOU)에 서명했고, MOU는 즉각 발효됐다고 미 고위 당국자가 밝혔다. 이란 측도 마수드 페제시키안 대통령이 MOU에 서명했다고 확인했다. 14개 조항으로 구성된 MOU는 군사작전의 종료, 호르무즈해협 개방, 이란의 핵무기 포기 및 농축 우라늄 처리, 대이란 제재 해제 등을 포괄적으로 다뤘다.
가장 논쟁적인 건 호르무즈해협에서 상선 통행을 시작하고, 60일 간 이란이 통행료를 징수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은 5항이다. 이는 바꿔 말하면 60일 이후엔 이란이 통행료를 부과하거나 해협을 통제하는 걸 미국이 제지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대목이다.
뉴욕 타임스(NYT)도 “60일 후에는 이란이 전쟁 전에는 부과하지 않았던 통행료를 부과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국제법상 항행의 자유가 보장되던 이전보다 오히려 상황이 후퇴한 셈이다. 또 트럼프가 지난달 27일 “(폭격으로) 날려버리겠다”고 경고했던 이란·오만 주도의 해협 관리 체계도 5항에서 사실상 인정됐다.
미 행정부 고위 당국자는 “향후 본협상에서 영구적인 무상 통항을 끌어내겠다”고 해명했지만, 해협 통제권을 절대 사수하려는 이란이 이미 MOU에 명문화한 대목에서 물러설 가능성은 희박하단 말이 나온다. 이란이 서명 직후 30일 안에 기뢰 제거와 각종 군사적 조치를 스스로 완료하겠다고 명시한 것도 영국·프랑스 등 다국적 연합군의 조력을 차단한 채 통제권을 장악하려는 기류와 무관치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서명한 종전 양해각서(MOU)를 들고 있는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 IRIB 텔레그램 채널 캡처=연합뉴스
실제 이란 측 협상단장인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의회 의장은 국영 TV 인터뷰에서 “해협에 대한 주권적 권리를 갖고 있고 당연히 서비스 요금을 받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핵 포기를 대가로 한 제재 전면 해제 약속(7항) 역시 이란의 진정성 있는 비핵화 조치를 담보할 안전장치는 없다는 지적이다. 지난 2015년 오바마 행정부 당시 이란과 맺은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에 포함됐던 ‘스냅백’도 이번 MOU에선 빠졌다. 스냅백은 합의 위반 시 제재를 즉각 복원하는 절차로, 이란의 비핵화 조치 이행을 견인한 핵심 기제였다. 하지만 이번 MOU에는 이런 안전장치도 없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와 미국의 1차·2차 독자 제재까지 모두 해제할 수 있도록 했다.
이와 별개로 미 의회가 결정해야 하는 제재 해제를 정부 간 MOU에 못박은 것 자체가 초법적 행위로, 현실성에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 대목이다. 대이란 제재 해제는 이란핵합의검토법(INARA)에 명시된 미 의회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이다. 윤강현 전 주이란 대사는 “행정부 권한만으로 처리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아 향후 의회 조율 과정에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비해 이란 비핵화 조항(8항)은 “핵무기를 획득·개발하지 않는다”는 기존 핵확산금지조약(NPT) 원칙을 재확인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고농축 우라늄(HEU) 처리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감독을 받으며 현장 희석을 원칙으로 한다는 최소 가이드라인만 제시하는 데 그쳤다. 구체적인 비핵화 쟁점은 60일간의 후속 협상(9항)으로 다 미뤄진 셈이다. 최종 합의 때까지 이란의 핵 프로그램은 현 상태를 유지한다는 문안도 포함됐다.
정근영 디자이너
반면 이란은 실질적인 비핵화 조치 이전에 경제적 보상을 먼저 누리게 됐다. 10항은 MOU 서명 즉시 그동안 제재로 막았던 이란산 원유와 석유 파생제품 수출을 허용하도록 규정했다. 시점은 제재 해제 전까지로, 사실상 이란은 이를 통해 계속해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서명 즉시 미국의 이란 해상 봉쇄 해제를 명시한 4항과 맞물려 비핵화 협상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란의 핵심 자금줄이 우선 복원된 셈이다. MOU 이행을 전제로 하긴 했지만, 약 1000억 달러 규모의 동결자산 사용(11항)도 허용된다.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선언적 수준의 합의에 석유 수출을 즉각 재개해주면서 미국의 협상력이 상실됐다”고 지적했다.
이란에 유리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인 이번 합의에 대해 미 보수진영에서도 비판이 거세다. 빌 커시디 공화당 상원의원(루이지애나)은 “레이건이 무덤에서 뒤척이고 있다. 최근 수십년간 최악의 외교정책 실수”라고 혹평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힘을 통한 평화’ 외교 노선에 흠집을 냈다는 의미다. 공화당 내 대(對)이란 강경파인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텍사스)은 “우리를 죽이려는 신정주의 광인들에게 수십억 달러를 주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라고 했다.
역내 동맹과 우방을 실질적으로 위협하는 이란의 핵 능력을 제거하는 것보다 서둘러 전쟁을 마무리하는 데 방점이 찍힌 이번 합의를 통해 트럼프 특유의 거래주의적 동맹관이 한층 노골화한 데 대한 우려도 크다. 동맹국을 동원해 최소 3000억 달러 규모의 이란 재건 기금을 조성하는(6항) 게 대표적이다. 이는 막대한 안보 청구서를 전가하는 행태라는 비판이 뒤따른다. 윤강현 전 대사는 “사전 협의도 없이 동맹국의 팔을 비틀어 자금을 갹출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더해 1항은 레바논을 포함한 모든 전선에서 군사 작전의 즉각적이고 영구적인 종료를 선언했다. ‘영구적’이란 표현을 쓴 건 이란이 핵개발이나 군사행동을 재개해도 군사적 옵션은 아예 내려놓겠다는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즉각 “우리는 MOU 체결 당사자가 아니므로 합의에 구속되지 않으며, 레바논에서 철군하거나 군사작전을 중단할 뜻이 없다”고 반발했다.
김정은(왼쪽)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019년 6월 30일 판문점에서 만나 손을 맞잡은 모습. 사진 조선중앙통신 홈페이지
비핵화 조치 없이도 경제적 보상과 체제 보장을 얻어낼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긴 이번 트럼프 합의가 북한 비핵화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란보다 더 고도화한 핵능력을 보유한 북한이 이보다 못한 조건으로 비핵화에 응할 가능성은 크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총무부장은 18일 담화를 통해 “핵을 동반한 군사적 위협 앞에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것 이상 어리석은 짓은 없을것”이라며 “핵보유는 반드시 고수해야 할 우리의 핵심이익이며, 비핵화는 절대로 넘어설수 없는 불퇴의 선”이라고 강조했다. 북한 비핵화 목표를 확인한 주요 7국(G7) 정상회의 결과물에 대한 반응이지만, 이는 이란에도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이번 MOU 체결과 무관치 않다는 해석도 나온다.
김재천 교수는 “북한은 핵을 거머쥔 채 버티면 미국도 어쩔 수 없다는 확신을 굳히게 됐을 것”이라며 “러시아와 중국의 비호 속에 이미 북한의 몸값이 크게 뛰었다. 향후 트럼프가 대화를 제의할 경우 북한은 기고만장하게 핵보유국 인정과 제재 전면 해제만을 요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