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21일(한국시간) 멕시코 몬테레이 스타디움에서 열린 조별리그 F조 2차전 튀니지와의 경기에서 세 번째 골을 넣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21일(한국시간)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F조 2차전 일본과 튀니지의 경기가 열린 멕시코 몬테레이 스타디움. “니뽄, 니뽄, 니뽄” 남쪽 관중석에서 일본 축구대표팀의 상징인 푸른색 유니폼을 입은 ‘울트라 니뽄(일본 응원단)’을 비롯한 일본 팬이 외쳤다. 그러자 반대편 관중석에서 “하뽄(스페인어로 일본), 하뽄, 하뽄”으로 화답했다. 정체는 현지 멕시코 팬. 멕시코의 초록색 홈 유니폼을 차려 입었지만, 몸이나 머리에 일장기를 두르고 있었다.
튀니지 선수가 공을 잡으면 양측 관중석에서 동시에 야유가 쏟아졌다. 일본을 향한 일방적인 응원이 위축이 됐는지, 잔뜩 움츠러든 튀니지 선수들이 패스미스를 연달아 범했다. 일본-멕시코 연합 팬은 킥오프 3시간 전부터 스타디움 주변에 모여 들어 일장기를 흔들고 “빅토리 니뽄”을 외쳤다. 안방 도쿄에서 치르는 일본의 홈경기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일본은 일찌감치 멕시코에 닛산, 도요타 등 일본 대기업들이 진출했다. 멕시코의 자동차 제조업의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현지에선 일본에 무척 우호적이다.
일본 팬들이 21일(한국시간) 멕시코 몬테레이 스타디움에서 열린 조별리그 F조 2차전 튀니지와의 경기에서 환호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일본-멕시코 팬의 든든한 응원을 받은 일본 대표팀은 멀티골을 터뜨린 우에다 아야세(페예노르트)의 활약에 힘입어 튀니지를 4-0으로 대파하고 이번 월드컵 첫 승을 거뒀다. 일본은 2002년 한·일 대회 조별리그(2-0승)에 이어 월드컵 무대 튀니지전 2연승을 달렸다. 일본이 월드컵 본선에 네 골 차 이상 승리를 거둔 것도 처음이다. 동시에 역대 아시아 팀 가운데 한 경기 최다 득점 기록이다. 종전 일본의 최다 골 차 승리 기록은 두 골 차 승리다.
일본은 월드컵 1000번째 경기에서 승리하는 겹경사도 맛 봤다. 1930년 우루과이에서 시작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치르지 못한 두 차례(1942, 1946년)를 제외하고는 4년마다 꼬박 개최돼 올해로 23회째를 맞은 월드컵은 일본-튀니지전이 1000번째 경기였다. 이로써 일본은 1차전에서 ‘우승 후보’ 네덜란드와 대등한 경기 끝에 2-2로 비긴 게 운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했다. 네덜란드는 앞서 열린 또 다른 F조 2차전에서 스웨덴을 5-1로 물리쳤다.
일본(6골)은 네덜란드(7골·이상 승점 4·골득실 +4)와 동률이고 골득실도 같지만, 다득점에서 밀려 조 2위가 됐다. 튀니지는 1차전에서 스웨덴에 1-5로 대패해 사브리 라무시 감독을 경질하고 에르베 르나르 전 사우디 감독을 선임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2연패를 당했다. 조 최하위다. 네덜란드, 일본과 스웨덴, 튀니지가 속한 F조는 이번 대회 ‘죽음의 조’로 평가받는다. 아울러 개막 직후 6경기 무패 행진을 이어가다 6연패 늪에 빠져 있던 아시아축구연맹(AFC) 가맹국의 연패 사슬을 끊고 아시아 축구의 자존심을 지켰다.
일본 스트라이커 우에다 아야세(왼쪽)가 21일(한국시간) 멕시코 몬테레이 스타디움에서 열린 조별리그 F조 2차전 튀니지와의 경기에서 네 번째 골을 넣고 세레머니를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일본은 이번에도 ‘전설의 1군(늘 최정예를 꾸리지 못하는 일본을 가리키는 말)’을 가동하지 못했다. 미토마 가오루(브라이턴)와 미나미노 다쿠미(모나코), 엔도 와타루(리버풀)가 월드컵 직전 부상으로 낙마한 데 이어 일본은 간판 공격수 구보 다케후사(레알 소시에다드)가 지난 15일 네덜란드와 1차전(2-2)에서 상대 태클에 걸려 왼 무릎을 다쳤다. 구보는 이번 경기에 일본 대표팀과 동행하지 않고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 인근 일본 대표팀 베이스캠프에 남았다.
하지메 모리야스 일본 감독은 잇단 부상 악재를 특유의 ‘시스템 축구’로 극복했다. 일본 축구는 짧고 정교한 패스 위주의 팀 전술을 먼저 구축하고, 그 시스템에 최적화된 선수를 각 포지션마다 투입하는 방식이다. 감독이 바뀌거나 주전급 선수가 빠져도 팀의 전체적인 틀과 경기 방식이 무너지지 않도록 매뉴얼화했다. 이날 일본은 2010년대 황금기를 구가한 스페인의 ‘티카타카(짧은 패스를 앞세운 점유율 축구)’처럼 빠르고 정확한 패스로 튀니지 수비의 숨통을 조였다. 컴퓨터 게임처럼 정밀하게 움직이는 일본 선수들이 공을 잡고 내줄 때마다 관중석에선 탄성이 나왔다. 선수의 화려한 개인기보단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플레이로 상대를 압도했다.
지안니 인판티노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가운데)가 21일(한국시간) 타카마도 히사코 일본 공주(오른쪽)와 함께 멕시코 몬테레이 스타디움에서 열린 조별리그 F조 2차전 일본과 튀니지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일본은 전반 4분 만에 기선 제압에 성공했다. 가마다 다이치(크리스탈 팰리스) 감각적인 발 뒤꿈치 킥으로 선제골을 터뜨렸다. 일본의 월드컵 역사상 최단 시간 득점 기록이다. 앞선 네덜란드전에서도 오가와 고키의 헤더가 자신의 머리를 맞고 굴절돼 행운의 첫 골을 올렸던 가마다는 이번 대회 두 경기 연속골의 주인공이 됐다. 기세가 오른 일본은 아야세가 전반 31분 강력한 오른발 슛으로 골망을 흔들었다. 후반에도 일본의 파상공세는 이어졌다. 후반 24분 이토 준야(헹크)의 추가골에 이어 후반 38분 아야세가 헤더로 또 한 번 튀니지 골망을 흔들며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한편, 같은 날 펼쳐진 E조 경기에선 독일이 코트디부아르에 2-1 역전승을 거뒀고, 에콰도르와 퀴라소는 0-0으로 비겼다.
몬테레이=피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