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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흘린 땀과 피 기억해야

Los Angeles

2026.06.21 18:52 2026.06.21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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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가는 노병들 (1)]
한국 어딘지도 모른채 입대
전장 속 쓰러진 전우들 선명
한국전쟁 참전 당시 자신의 소속 부대와 복무 기간이 적힌 철모에 턱을 괴고있는 앨버트 곤잘레스. [한국전참전용사협회(KWVA) 제공]

한국전쟁 참전 당시 자신의 소속 부대와 복무 기간이 적힌 철모에 턱을 괴고있는 앨버트 곤잘레스. [한국전참전용사협회(KWVA) 제공]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노병들에게 그날의 포성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생생한 기억이다. 76년 전,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낯선 나라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청춘을 바친 참전용사들. 이제 세월의 무게 앞에 그들의 위대한 기억과 숨결도 하나둘 저물어가고 있다. 본지는 오는 25일 한국전쟁 발발 76주년을 맞아 더 늦기 전에 기록해야 하고, 반드시 기억해야 할 그날의 사투와 숭고한 유산을 참전 노병들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 전한다.
 
 
 “자유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인 앨버트 곤잘레스(95)는 17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70여 년 전 자신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나라, 한국을 떠올리며 이같이 말했다.  
 
전쟁의 기억은 아득한 옛일이 되었지만, 그의 어조에는 여전히 선명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한국전쟁은 결코 잊혀서는 안 되며, 그 피와 눈물 위에 세워진 자유와 번영은 이제 다음 세대가 온전히 지켜나가야 한다는 당부다.
 
뉴저지주 포트리에서 자란 그는 고등학교 졸업반이던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소식을 접했다. 당시 남학생들은 졸업반이 되면 의무적으로 징병 등록을 해야 했다.
 
곤잘레스는 “당시 신문에서 한국 전선의 육군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징집 명령을 마냥 기다리기보다 해병대에 자원입대하는 길을 택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이듬해 1월 군복을 입었다.
 
당시 그가 한국에 대해 알고 있던 정보라곤 과거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이 전부였다. 그런 그에게 한국은 낯설고 두려운 나라였다. 가주 오션사이드의 캠프 펜들턴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마친 그는 1951년 8월 부산항에 도착했다. 처음 마주한 한국의 풍경에 대해 그는 “마치 영화 속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고 했다. 한국인들의 옷차림도 생경했다. 그는 “남성들과 여성들이 그런 형태의 옷을 입은 모습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곤잘레스는 당초 보병으로 배치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신체검사 과정에서 ‘2도 평발’이 발견되면서 전역 조치될 위기에 처했다.  
 
그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을 것”이라며 군에 남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그는 전차부대로 배치됐다.
 
그가 탑승한 장비는 ‘앨리게이터’로 불린 LVT-1 수륙양용 장갑차였다. 그의 부대는 김포를 주둔지로 삼고 강화도와 한강 일대에서 주로 임무를 수행했다. 중국군 게릴라가 출몰하면 강화도 방면으로 이동해 격렬한 전투를 벌인 뒤 다시 주둔지로 복귀하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참혹했던 전투 현장은 지금도 뇌리에 선명히 박혀 있다.
 
곤잘레스는 “중국군의 전투 태세는 매우 전문적이고 위협적이었던 반면, 북한군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이어 “총알이 나를 향해 날아오다 살짝 빗나가 바로 옆에 있던 동료를 맞힌 적도 있었다”며 “가까운 거리에서 전우들이 쓰러지던 비극적인 장면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생사를 함께한 전우들에 대한 기억도 뚜렷하다. 가장 막역했던 친구는 뉴욕 퀸스 출신의 조 패산틴이었다. 두 사람은 뉴욕에서 훈련 캠프로 향하던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 단숨에 단짝이 됐다. 이후 수십 년간 가족처럼 교류했고, 곤잘레스는 자신의 자녀 중 한 명의 대부로 패산틴을 세우기도 했다.  
 
곤잘레스는 1952년 8월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카리브해 지역에서 추가 복무를 마친 뒤 1954년 전역했다.
 
그의 후손들 역시 대를 이어 한국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여섯 아들 중 두 명이 주한미군으로 각각 서울과 포항에서 근무했다. 손녀는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뒤 현재 로비스트로 활동하며 전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고 있다.
 
잿더미 속 폐허였던 한국이 오늘날 세계적인 경제·문화 강국으로 눈부시게 변모한 모습을 볼 때, 95세 노병은 누구보다 깊은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그런 그가 한국을 향해 던진 마지막 메시지는 묵직한 경고이자 애정 어린 당부였다.
 
“한국을 위해 청춘을 바쳐 싸웠던 사람으로서 간절히 바라는 것은, 오늘날 한국의 젊은 세대가 부모와 조부모 세대가 나라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흘렸던 피와 땀을 기억하고 이를 계속 이어가는 것입니다. 한국이 공산주의로 다시 향할 수도 있는 위험한 움직임이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며, 단 한 번 지켜냈다고 해서 영원히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한인 차세대들이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한국전쟁의 역사를 알리는 전도사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곤잘레스는 “인근 고등학교를 찾아가 학생들에게 그들의 조국인 한국에서 70여 년 전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구체적으로 가르쳐 준다”며 “미국의 독립전쟁이나 세계대전만큼이나 한국전쟁도 후세들이 깊이 있게 배워야 할 위대한 역사”라고 강조했다.
 

김경준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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