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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자리로 보는 세상만사] 히말라야서 피어난 침뜸의 온기

Los Angeles

2026.06.22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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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선 / 한의학 박사 강병선 침뜸병원장

강병선 / 한의학 박사 강병선 침뜸병원장

 ‘인명지중 유귀천금(人命至重 有貴千金)’.
 
당나라 명의 손사막은 ‘천금요방’에서 사람의 생명은 지극히 무거워 천금보다 귀하다고 했다. 아픈 이를 향해 어떤 마음으로 다가서야 하는지를 묻는 이 오래된 가르침은 병을 다스리는 의자(醫者)에게 단순한 지식이 아닌 인술(仁術)의 시작이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고통 앞에 머무르며, 한 사람의 숨결과 체온을 온전히 살피는 일이야말로 의학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2003년, 나는 한국대학산악연맹 훙치 원정대의 의료대장으로 히말라야에 올랐다. 해발 7038m 미지의 고봉 훙치(Hungchi)는 젊은 산악인들의 도전을 부르는 장엄한 산이었지만, 의료대장인 내 어깨에는 대원들의 생명을 책임져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이 먼저 내려앉았다.
 
가장 큰 복병은 소리 없이 찾아와 신체와 정신을 무너뜨리는 고산병이었다. 해발 4900m 베이스 캠프에 도착하자 대원들은 산소 부족과 극심한 추위 속에서 터질 듯한 두통, 구역감, 불면을 호소했다.  
 
평소 강인한 체력을 자랑하던 젊은이들도 고산 환경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고, 양방 고산병약은 손발 저림 같은 부작용을 낳았다. 산 위에서는 작은 증상 하나가 곧 등반 전체의 실패나 조난으로 이어질 수 있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그때 내가 조심스럽게 꺼내 든 것은 스승 구당 김남수 선생님께 사사한 침통과 뜸쑥이었다. 만년설이 휘몰아치는 텐트 안, 희박한 공기 속에서 우리 전통 침뜸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고산병은 한의학적으로 보면 낮은 기압과 산소 저하로 인해 몸 안의 기혈 순환이 급격히 막히는 ‘기체혈어(氣滯血瘀)’의 상태다. 머리로 맑은 양기가 올라가지 못하니 두통이 오고, 비위(脾胃)가 상하니 구토가 나는 법이다.
 
먼저 깨질 듯한 두통을 호소하는 대원에게 백회(百會)와 태양(太陽)혈 부위에 침을 놓아 머리의 압력과 긴장을 풀어주었다. 침을 맞고 잠시 뒤, 대원은 “머리에 가득했던 안개가 비로소 걷히는 것 같다”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속이 메스껍고 구토 증상으로 음식조차 넘기지 못하는 대원에게는 내관(內關)과 족삼리(足三里)를 중심으로 침을 놓고 뜸을 떴다. 요동치던 위장이 안정되자 대원들은 다시 수저를 들고 체력을 조금씩 회복해 갔다.
 
침뜸의 진가는 현지 셰르파(Sherpa)들에게서도 눈부시게 빛났다. 평생을 산과 함께 살아온 베테랑들도 무거운 짐을 지고 캠프를 오르내리다 보면 고산증 피로와 관절의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처음에는 낯선 동양 의술을 의구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그들이 침과 뜸을 받은 뒤 통증이 씻은 듯 사라지자 하나둘 내 텐트 앞으로 찾아와 줄을 서기 시작했다.
 
어느새 베이스 캠프 한쪽은 국경을 초월한 ‘에베레스트 초등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전 세계 산악인들을 위한 작은 ‘침뜸 진료소’가 되었다. 언어는 달랐지만 아픔은 같았고 뜸 한 장이 전하는 따뜻함도 같았다. 침뜸으로 고산병을 극복하고 환하게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세계 각지의 알피니즘들을 보며 나는 구당 선생님께서 늘 강조하시던 인술의 참된 의미를 되새겼다.  
 
침뜸은 단순히 침을 꽂고 불을 붙이는 기술이 아니라, 아픈 사람의 곁에 묵묵히 머무르며 그 고통을 온몸으로 함께 덜어내려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마음에서 시작됨을 깨달은 것이다.
 
최종 등정을 앞둔 밤에는 대원들의 심폐 기능과 체력을 돕고자 폐유, 고황, 관원 등을 중심으로 정성껏 뜸을 떴다. 칼바람이 게세게 텐트를 흔드는 밤, 은은하게 타오르는 뜸 불빛은 대원들의 몸과 마음을 감싸 안으며 다시 한 걸음 나아가게 하는 고귀한 용기가 되어주었다.  
 
마침내 2003년 4월 24일 새벽, 원정대 공격조 전원은 단 한 명의 낙오자 없이 정상에 우뚝 섰다. 그 영광의 중심에는 기혈을 열어준 침 한 대와 뜸 한장의 숨은 역할이 있었다.
 
히말라야라는 거대한 자연과의 만남은 내 삶의 나침반을 돌려놓았다. 자연 앞에 겸허함을 배우고, 극한의 한계를 침뜸으로 극복한 경험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용기를 주어 결국 미국 이민이라는 새로운 도전의 길로 이어졌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로스앤젤레스에서 환자를 돌보다 지치고 힘들 때면 문득 히말라야의 그 차갑고도 뜨거웠던 밤을 떠올린다. 만년설 위에 피어났던 침뜸의 온기. 그것은 스승에게 배운 구당의 인술이 국경과 언어를 넘어 인간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음을 보여준 소중한 기록이자, 내가 의자(醫者)로서 환자 앞에 설 때마다 초심을 잃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가슴속 가장 깊은 경구(警句)로 살아 숨 쉬고 있다.

강병선 / 한의학 박사 강병선 침뜸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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