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세 카투사 참전용사의 당부 전쟁 희생 위에 세운 대한민국 "이념 갈등 넘어 더 큰 나라 돼야"
“정치적 양극화로 서로 발목을 잡고 분열하는 고국의 모습을 볼 때면 마음이 쓰라릴 정도로 아픕니다.”
한국전쟁 당시 창설된 카투사(KATUSA) 초창기 병사로 복무한 하세종(92·사진)씨는 지난 19일 본지와 인터뷰에서 한국전쟁의 참상을 복기하며 한국의 현 정치 상황에 대해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 피로 지켜낸 자유 대한민국이 오늘날 세계적인 경제·문화 강국으로 우뚝 섰지만, 고질적인 정치·이념 갈등이 국가 도약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1934년 서울에서 태어나 보성중·고등학교를 다닌 하씨는 전쟁 발발 당시 불과 16세의 소년이었다. 하씨는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대동아전쟁을 귀동냥으로 배웠지만, 실제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는 전혀 몰랐다”고 털어놓았다. 이승만 대통령의 라디오 방송을 듣고 곧 상황이 수습될 줄 알았으나, 전쟁은 불과 며칠 만에 집 앞마당까지 밀려들었다.
1950년 6월 27일 새벽, 서울 명륜동 자택에 머물던 하씨 가족은 굉음에 잠을 깨야 했다. 그는 “문밖을 내다보니 북한군 탱크와 군용 오토바이 수십 대가 대열을 지어 지나가고 있었다”며 “그중 탱크 한 대가 우리 집을 향해 갑자기 함포를 쏘았고, 수많은 총탄과 파편이 집 안으로 박혀 들었다”고 당시의 긴박했던 순간을 생생히 증언했다.
총알과 파편은 하씨 일가를 덮쳤다,
하씨는 “부모님과 할아버지가 총탄 파편에 맞아 쓰러지셨고, 할머니는 이마에 심각한 총상을 입으신 뒤 서울 수복 이후 끝내 세상을 떠나셨다”며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때 처절하게 깨달았다”고 말했다. 전쟁을 정면으로 마주한 하씨 가족은 동대문을 거쳐 뚝섬으로 피신했다. 이후 1·4 후퇴 때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내려가는 고난의 피란길에 올랐다.
하씨는 피란처인 부산에서 군에 징집됐다. 그는 “당시에는 전시 상황이라 영장이 원활히 전달되지 못하던 때”라며 “헌병과 경찰이 거리에서 청년들을 무작위로 검문하며 신분증을 확인하고 징집 대상자를 가려냈다”고 설명했다.
거리 검문 당시 16세였던 하씨는 17세가 되면 학도병으로 등록하라는 지침을 받았다. 이듬해인 1951년 학도병 대상자로 등록하는 과정에서 “영어를 할 줄 안다”고 답한 것이 그의 인생을 카투사의 길로 이끌었다. 하씨는 “영어 필기시험과 구두 면접을 거쳐 부산에 있던 미 8군 통신대 본부에 최종 배속됐다”고 밝혔다.
하씨는 1951년 5월부터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카투사로 전장을 누볐다. 그의 주 임무는 후방 지역에서 통역이었다. 미군과 한국군, 그리고 민간인 사이의 가교가 되어 밀가루 배급, 고아원 지원 사업, 부산항으로 유입되는 외국군 수송 지원, 군 병원 행정 등 행정과 구호가 필요한 모든 현장을 넘나들며 통역을 도맡았다.
하씨는 당시를 회고하며 “전쟁은 최전방 전선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카투사 복무 시절 만난 설리번 미군 대위는 그의 인생 행로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설리번 대위는 어느 날 전쟁으로 황폐해진 민둥산을 바라보며 하씨에게 “미국에 가 산림학을 공부해 전후 한국의 복구와 재건에 힘을 보태라”고 권유했다. 당시 미국 유학을 가려면 재정보증을 서줄 현지 후원자가 필수적이었는데, 설리번 대위가 선뜻 직접 스폰서가 되어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후 하씨는 문교부와 외무부, 주한 미국대사관이 주관하는 까다로운 선발 시험을 모두 통과한 뒤에야 유학길에 오를 수 있는 비자를 손에 쥐었다.
노던 애리조나대에 입학한 그는 당초 계획했던 산림학 대신 산업경제학으로 전공을 선회했다. 하씨는 “당장 굶고 있는 한국을 살리기에는 풀과 나무만 연구하는 데 한계가 있겠다고 판단했다”며 “차라리 거시적인 경제를 배워 국가 경제 부흥에 실질적인 보탬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1960년 대학 졸업 후 고국 행을 준비하던 그는 이듬해 발생한 5·16 군사정변으로 귀국 계획을 잠시 접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이 선택은 그가 미국 사회에 정착하는 계기가 됐다. 1962년 애리조나주 선더버드 국제경영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세계적인 광고대행사 ‘맥켄에릭슨’에 스카우트돼 10년간 근무하며 국제선전기획실장까지 역임했다. 이후 미국 우수 제품을 한국에 수출하는 무역업을 일으켜 한·미 경제 교류의 초창기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하씨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과거의 기억으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경이롭게 발전한 나라”라고 극찬했다. 그러면서도 한국 사회가 전쟁이 남긴 본질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경종을 울렸다. 전쟁의 아픔을 단순한 과거사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내기 위해 치른 고귀한 대가로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씨는 마지막으로 고국과 후대를 향해 간곡한 당부를 남겼다.
“정치적·이념적 갈등을 극복하고 내부적으로 더 단단해진다면 대한민국은 지금보다 훨씬 더 큰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을 기억하는 것은 과거에 얽매이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엄숙한 과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