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6·25와 관련된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내가 여덟 살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포성을 피해 가족과 피난길에 올랐고, 1·4 후퇴 때는 군함을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배고픔과 가난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그때, 나는 처음 미국 군인들을 보았다. 우리에게 사탕을 건네며 환하게 웃어주던 그들의 모습은 전쟁의 공포에 질려 있던 어린 마음에 미국에 대한 고마움으로 새겨졌다.
세월이 흘러 의과대학을 졸업한 나는 1968년, 인턴 수련을 받기 위해 미국의 한 작은 도시 병원에 도착했다. 의사와 간호사들 모두가 친절했으나 병원 도서관장 ‘미세스 그린’만은 예외였다. 그녀는 늘 얼룩 하나 없는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꼿꼿하게 앉아 일했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영어도 서툴고 문화에도 익숙지 않았던 나는 그녀의 무표정이 차갑게 느껴져 가까이 가기조차 꺼렸다. ‘동양인이라서 차별하나, 무시하나’ 하는 불쾌감까지 들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눈보라를 뚫고 찾아간 도서관에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근무하던 메리에게 행방을 묻자, 그녀는 나직하게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미세스그린에게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교 2학년, 1학년인 두 아들이 있었다. 두 아들이 머나먼 이국땅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일 년 간격으로 두 아들이 전사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삶이 통째로 무너졌던 어머니는 깊은 우울증으로 이 병원에서 오랜 치료를 받은 끝에 겨우 도서관 일을 시작했다. 매년 아들들이 전사한 이맘때가 되면, 휴가를 내어 두 아들이 잠든 국립묘지에 간다고 했다.
그 순간 어린 시절 피난길을 회상했다. 전쟁은 나에게 가난과 배고픔을 주었지만, 저 어머니에게서는 삶의 전부인 두 아들을 빼앗아 갔다. 인종차별을 한다며 미워했던 나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도서관을 뛰쳐나왔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올라와 목에 걸렸다. 말로 다 할 수 없이 미안하고 고마웠다. 눈보라 속에서 아들의 하얀 비석을 끌어안고 통곡하는 하얀 불라우스의미세스 그린이 떠올랐다. 그녀의 눈물이 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후 도서관에 갈 때마다 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벼르고 벼르다가 끝내 내 마음을 입 밖으로 전하지 못한 채 인턴 기간이 끝났다. 떠나기 전 그녀의 손 한 번 잡아주지 못한 것은 평생 마음의 빚으로 남았다.
이제야 알 것 같다. 미세스 그린의 무표정은 차별이나 무시의 차가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먼저 떠난 자식들을 향한 그리움의 침묵이었고,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야 했던 어머니의 거룩한 슬픔이었다.
다시 6월이다. 여덟 살 어린아이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살아남아 미국에 왔다. 남의 나라를 구하려고 자기 생명을 내어준 청년들과 그 가족에게 진 빚을 생각한다. 당신들의 고귀한 희생과 깊은 아픔을 잊지 않겠노라는 편지를 마음의 책갈피 속에 깊이 끼워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