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라이나 캐롤라인 (CAROLINA CAROLINE) 친모를 찾아 남부 횡단에 나선 젊은 여성 사기꾼 연인과 범죄 저지르며 질주 이어가 유전적 비극과 가족의 상처 마주한 스릴러
서던 고딕 특유의 후끈하고 끈적한 대기감과 감각적인 연출로 ‘트루 로맨스’, ‘황무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와 같은 장르의 명작들이 연상된다. [Magnolia Pictures]
로드 무비와 서던 고딕(Southern Gothic)이 결합할 때 발생하는 독특한 장르적 화학 작용은 ‘공간의 광활함’과 ‘정서의 폐쇄성’이 부딪치는 모순에서 기인한다. 끝없이 뻗어 있는 텍사스의 아스팔트 도로와 그 위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열기로 상징되는 남부의 지평선은 언제나 기만적이다. 탈출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듯하지만, 막상 그 길 위에 올라탄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쇠락과 부패, 그리고 영원히 반복되는 과거의 망령들뿐이다.
애덤 카터 레미어 감독의 신작 ‘캐롤라이나 캐롤라인’은 바로 그 지독한 모순의 공기를 106분 동안 달려간다. 그의 전작 ‘디너 인 아메리카’에서 특유의 아나키스트적 인디 감성과 뒤틀린 로맨스를 선보였던 레미어 감독은, 이번 작품에 이르러 장르적 문법을 한층 더 깊고 어두운 쪽으로 끌고 간다.
클래식 범죄 도주극(Lovers-on-the-run)의 찬란한 부활을 알리는 ‘캐롤라이나 캐롤라인’은 텍사스 로드에서 일어나는 도주와 사랑을 아주 끈적하고도 밀도 높게 포착해 낸 수작이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Bonnie and Clyde, 1967)’, ‘황무지(Badlands, 1973)’, ‘트루 로맨스(True Romance, 1993)’ 등 선배 거장들이 이룩한 도주극의 유산을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그 질주 끝에 기다리고 있는 목적지를 ‘사회적 파멸’이 아닌 ‘유전적 잔혹사와의 대면’으로 설정함으로써 레미어 감독만의 독창적인 영토를 확보한다.
영화의 시발점은 텍사스의 한적하고 먼지 날리는 시골 주유소다. 그곳에서 권태와 지루함에 절여진 채 일상을 저주하던 주유소 직원 캐롤라인(사마라 위빙)의 세계에, 매력적이지만 닳고 닳은 사기꾼 올리버(카일 갤너)가 침입한다. 두 인물이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의 스파크는 레미어 감독의 전작들이 보여준 날것 그대로의 감각을 이어간다. 캐롤라인에게 올리버는 단순한 연인이 아니라 자신의 비루한 현실을 부수어 줄 ‘탈출구’ 자체이며, 올리버에게 캐롤라인은 평생을 목적지 없이 떠돌던 사기꾼 인생에 처음으로 나타난 ‘쉼터’다.
여기서 영화는 로드 무비의 고전적 형식을 빌려 두 사람의 여정에 시동을 건다. 자신을 아주 어릴 적 버리고 떠난 친어머니 ‘캐롤라이나’를 찾아 동남부를 가로지르겠다는 캐롤라인의 맹목적인 목표는, 올리버라는 엔진을 만나 범죄라는 연료를 흡입하기 시작한다. 돈이 없는 그들이 선택한 주유소 털이와 사기 행각은 스릴러의 형식으로 진행되지만, 카메라가 포착하는 것은 범죄의 잔혹함보다는 그 범죄가 주는 해방감 속에서 더욱 단단해지는 두 사람의 정서적 결속이다.
흥미로운 점은 지휘봉의 이동이다. 흔히 이러한 도주극에서 남성 캐릭터가 범죄를 주도하고 여성이 수동적으로 이끌려가거나 타락하는 서사적 클리셰와 달리, ‘캐롤라이나 캐롤라인’은 여정이 지속될수록 캐롤라인이 점차 주체적으로 폭주하고 올리버가 그녀를 향한 순수한 헌신으로 그 폭주를 받쳐 주는 구조를 취한다.
은행까지 털어버리는 대담함의 이면에는, 어머니를 대면해야 한다는 캐롤라인의 불안과 집착이 자리 잡고 있다. 위험이 고조될수록, 경찰의 추격망이 숨통을 조여 올수록 이들의 사랑이 더욱 애절하고 숭고하게 느껴진다. 레미어 감독은 서사의 중심추를 범죄의 스펙터클이 아닌 두 인물의 결핍과 상호 구원으로 대신한다.
‘캐롤라이나 캐롤라인’은 영리하게 조율된 로맨틱 스릴러다. 두 주인공은 사랑하기 때문에 위험에 처하고, 위험에 처했기 때문에 더 격렬하게 사랑하게 된다.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이 동시에 작용하며 서로를 증폭시킨다.
‘캐롤라이나 캐롤라인’은 스토리만 놓고 보면 기시감이 드는 낡은 서사일지 모른다. 그러나 레미어 감독은 클리셰의 틈새마다 생생한 캐릭터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이 영화가 지닌 감정적 설득력은 두 주연 배우 사마라 위빙과 카일 갤너의 스크린을 불태우는 뜨거운 연기에 바탕한다. 생생한 핏기를 돌게 만드는 이들의 경이로운 앙상블은 그 자체로 이 영화의 가장 강력한 시각적 미장센이자 플롯이 된다.
사미라 위빙은 범죄를 저지를 때의 광기 어린 아드레날린으로 번뜩이다가도, 문득문득 찾아오는 버림받은 아이로서의 근원적 외로움을 서글프게 토해낸다. [Magnolia Pictures]
위빙은 그간 ‘레디 오어 낫(2019)’ 등 주로 호러와 블랙 코미디 장르에서 스크림 퀸, 또는 액션 여전사로서 이미지를 구축한 배우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위빙은 커리어 사상 가장 연약한 내면을 가진 인물을 연기한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은 범죄를 저지를 때의 광기 어린 아드레날린으로 번뜩이다가도, 문득문득 찾아오는 버림받은 아이로서의 근원적 외로움을 서글프게 토해낸다.
그녀는 캐릭터의 폭력성과 연약함이라는 극단적인 두 층위를 아무런 어색함 없이 오가며, 관객으로 하여금 그녀의 범죄 행각을 도덕적으로 단죄하기 전에 감정적으로 동조하게 만드는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한다.
그녀의 폭주를 온전히 받아내는 카일 갤너의 연기 역시 주목받을 만하다. 최근 장르 영화계에서 가장 과소평가된 배우 중 한 명인 그는 이번 작품을 통해 전형적인 마초성의 틀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연기 변신에 성공한다. 세속적인 사기꾼의 비루한 표정 위로 기어이 투명한 순정을 얹어내는 그의 올리버는, 캐롤라인을 바라보는 눈빛 하나만으로 인물의 정당성을 획득한다.
카일 갤너는 이 시대 가장 과소평가된 배우 중 한 명이다. 이전의 미초형 범죄자의 틀을 완전히 벗어 버리고 무해하고 투명하며 순수한 사랑을 지닌 매력적 사기꾼 올리버를 연기한다. [Magnolia Pictures]
갤너는 대사보다 침묵과 시선으로 더 많은 것을 말하며, 캐롤라인의 깨어진 세계를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메우려는 지독한 로맨티스트의 얼굴을 완성했다. 두 배우가 달리는 차 안에서, 혹은 허름한 모텔 방에서 나누는 교감은 스크린을 뚫고 나올 듯한 생생한 화학 작용을 일으키며 이 비극적 도주극에 아름다운 정당성을 부여한다.
영화의 결말은 장르의 규칙을 충실히 따르는 듯하면서도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육군과 경찰에 겹겹이 포위된 저택에서, 더 이상 물리적 탈출구가 없음을 깨달은 올리버는 캐롤라인을 살리기 위해 모든 죄를 짊어지고 총탄 속으로 뛰어든다. 이는 스릴러 장르의 흔한 희생 플롯처럼 보이지만, 올리버에게 캐롤라인은 유일한 구원처이며 사랑을 지키기 위한 완성형 로맨스의 종착지다.
영화의 결정적인 순간 흘러나오는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노래 ‘My Father’s House’는 관객을 청각적 카타르시스의 최고조에 오르게 한다. 원죄와 구원의 테마와 절묘하게 맞물려 있다.
잘 짜인 범죄극이라기보다는 가슴 저린 황금빛 잔상을 관객의 가슴에 남기고 사라진, 한 편의 지독하고 아름다운 멜로드라마를 본 듯한 느낌이다. 2020년대 로맨틱 스릴러와 서던 고딕의 계보에서 한동안 길게 회자될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