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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세 노병의 외침 “한국전, 잊힌 전쟁 아니야”

Los Angeles

2026.06.24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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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돼야 할 참전용사들 (4)]
수많은 삶 송두리째 바꾼 전쟁
인천 상륙부터 포로 심문 통역
“한인들 참전용사 기억해주길”
한국전쟁 중 촬영된 노리오 우에마쓰(앞줄 오른쪽)씨와 같은 부대에서 근무한 한인 병사 윌리엄 서(뒷줄 왼쪽)씨의 모습.  [노리오 우에마쓰 제공]

한국전쟁 중 촬영된 노리오 우에마쓰(앞줄 오른쪽)씨와 같은 부대에서 근무한 한인 병사 윌리엄 서(뒷줄 왼쪽)씨의 모습. [노리오 우에마쓰 제공]

“한국전쟁을 ‘잊힌 전쟁(forgotten war)’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많은 미군이 희생됐습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 노리오 우에마쓰(95·왼쪽 사진)씨는 한국전쟁의 희생과 역사가 더 폭넓게 기억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한인사회가 참전용사 추모와 기념행사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우에마쓰씨는 “한국전 참전용사 모자를 쓰고 다니면 미국인들은 ‘복무해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인타운에서 그런 말을 들은 것은 지금까지 단 한 번뿐이었다”며 “한인들이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은 잘 알지만, 기념행사 현장에 직접 나와 참전용사들을 기억해주는 참여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1931년 북가주 쿠퍼티노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1927년 일본의 쇼와 금융공황 속에 멕시코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와 살리나스와 서니베일 일대 농장에서 일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진주만 공습으로 뒤바뀌었다. 1941년 이후 서부 지역 일본계 미국인 약 12만 명이 수용소로 강제 이주됐고, 당시 11세였던 우에마쓰씨도 가족과 함께 와이오밍 수용소로 보내졌다. 이후 그의 가족은 1945년 수용소에서 풀려난 뒤 유타주 브리검시티에 정착했다.
 
그가 군에 입대한 것은 17세가 되던 해인 1949년이었다. 우에마쓰씨는 “당시는 징집되던 때라 기다리기보다 자원입대를 택했다”며 “아버지는 입대 동의서에 곧바로 서명해 줬지만, 어머니를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회고했다.
 
처음에는 텍사스주에서 대공포병 훈련을 받았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우에마쓰씨는 일본에서 추가 훈련을 받은 뒤 배를 타고 1951년 7월 인천에 도착했다. 그가 처음 마주한 한국의 모습은 참담했다. 우에마쓰씨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여성과 노인, 아이들의 피란 행렬을 목격했다”고 전했다.
 
그는 당초 대공포병 임무를 맡을 예정이었으나, 일본어 회화가 가능하다는 이유로 제521군사정보소대에 배치됐다. 그는 “당시 상관에게 일본어를 읽거나 쓰지는 못하지만 말은 할 줄 안다고 하자 나를 통역병으로 차출했다”고 전했다.
 
주된 임무는 북한군 포로 심문 통역이었다. 그는 전쟁 기간 약 100명의 포로를 심문했다며 “포로들이 모두 일본어를 할 줄 알아 신기했다”고 말했다.
 
우에마쓰씨는 포로 취조의 순간을 “슬펐다”고 돌아봤다. 그는 “많은 이들이 자원해서 전쟁에 온 것이 아니었다”며 “특히 그들의 가족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무거웠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군 병사들과 함께한 순간을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당시 한국군 중에서도 일본어를 구사하는 이들이 적지 않아 대화를 나누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우에마쓰씨는 “한국군 덕분에 쌀밥도 먹을 수 있었고, 부대의 한국인 하우스보이도 나와 동료들을 많이 도와줬다”고 밝혔다.
 
우에마쓰씨는 1952년 7월 복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LA에 정착해 대학을 졸업한 뒤 링 일렉트로닉스 등 남가주 지역 전력 및 제조업체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은퇴 후에는 한국전쟁의 기억을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1995년에는 일본계 미국인 한국전쟁참전용사협회도 창립했다. 특히 2022년에는 워싱턴 DC 한국전 참전용사 추모의 벽 행사에 참석해 전쟁의 기억을 전하기도 했다.
 
우에마쓰씨는 “한국전쟁은 단순히 과거의 전쟁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사건”이라며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 후세도 이 전쟁과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경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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