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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이름, 그 소중한 고유명사

Los Angeles

2026.06.25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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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현 미술평론가·시인

장소현 미술평론가·시인

비율빈, 서반아, 오란다, 오지리, 서서, 향항, 로서아….
 
아마, 이런 나라 이름을 요즘 세대는 모를 것이다. 필리핀, 스페인,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스위스, 홍콩, 러시아라고 부르면 금방 알 것이다. 예전에는 그런 식으로 불렀다. 중국이나 일본의 한자 표기를 우리 식으로 읽은 것이다. 그러다 국제화가 되면서 제 이름을 찾았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미국, 영국, 독일, 중국, 호주, 일본, 이태리 등은 아직도 옛날식 그대로 부른다. 프랑스, 불란서처럼 양쪽을 다 쓰는 경우도 있다.
 
사물을 어떻게 부르느냐는 그 대상을 어떻게 파악하느냐를 의미한다. 특히, 고유명사는 중요하다. 사물의 정체성이나 역사적 배경 등 고유의 가치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부르느냐는 부르는 이와 대상 사이의 거리를 말해주기도 한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면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이 지역을 로스앤젤레스라고 부르느냐, 엘에이라고 부르느냐, 나성이라고 부르느냐, 또는 ‘서울시 나성구’라고 부르느냐에 따라 심리적 거리나 친밀감이 달라진다. 다른 말로 하면 엘에이에는 한국 사람이 많이 살고 있고, 영향력도 제법 있으니 한국식으로 ‘나성’이라고 친근하게 불러도 될 것이라는 심리가 깔린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라는 노래가 인기를 끌고, ‘서울시 나성구’라는 다소 도발적인 낱말도 눈길을 끄는 것이다.
 
이에 비해, 샌프란시스코를 ‘상항’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고, 미국의 도시를 우리식으로 부르는 예도 없는 것으로 안다. 마찬가지로 이 나라를 미국(美國), 즉 아름다운 나라라고 부르는 것과 아메리카나 USA로 부르는 것 사이에는 심리적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한편, 한자 문화권인 동양 3국에서는 고유명사의 교통정리가 좀 복잡하다. 우리는 안중근 의사가 저격한 인물은 ‘이토 히로부미’가 아니고 ‘이등박문’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주장한다. 하지만 인기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촌상춘수(村上春樹)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모택동, 주은래, 등소평, 이태백 등은 어떤가? 개인적인 경험을 말하자면, 전공인 동양미술사를 공부할 때 영어로 된 책을 읽어야 하는데 화가나 인물들의 이름 표기가 그동안 익혔던 것과 생판 달라서 크게 애를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공자, 맹자, 노자 같은 것도 다르니 정말 정신이 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고유명사는 이름이다. 김춘수 시인이 명시 ‘꽃’에서 노래한 것처럼 이름을 불러줘야 비로소 내게 온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나는 주변의 자연에 미안하기 짝이 없다. 꽃이나 나무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지만 정작 이름을 아는 것은 몇 가지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면 그 사람은 나의 세계 안에서 선명한 의미를 가진 존재가 된다. 이름 부르기는 바깥에 있던 타자를 불러와서 우리의 두 세계를 연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김지연 미술평론가 ‘등을 쓰다듬는 사람’에서
 
젊은 제인 구달이 아프리카에서 처음 침팬지를 관찰하면서, 늘 살펴보는 침팬지들에게 각각 이름을 붙여주었다가 학계 원로들의 비난을 받은 일화는 유명하다. 기존의 학계에서는 과학적 객관성을 지키기 위해 관찰의 대상인 동물들을 번호나 기호로 부르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만큼, 과학연구에 인간적 감정을 개입시키면 안 된다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동물 연구 분야의 학문적 새 지평을 연 것은 자기가 관찰하는 대상에 이름을 붙여 부른 제인 구달 박사의 열린 마음과 사랑이었다.

장소현 / 미술평론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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