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1월 5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이 대통령 공식환영식에서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연합뉴스
중국은 침묵한다. 한국 정부는 앞장서 그 침묵을 대변한다. 최근 외교가에서 중국의 북한 비핵화와 관련한 입장을 두고 잇달아 포착되는 묘한 장면이다.
외교부 고위 관계자는 지난 22일 기자들과 만나 최근 확산하는 중국의 ‘북핵 묵인론’에 대해 “중국이 북핵을 묵인한다고 보지 않는다”며 “필요에 따라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일 뿐 정책 변화가 있다고 판단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음날인 23일엔 또 다른 당국자가 “중국이 한반도 비핵화를 철회하고 북핵을 용인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가 필요에 따라 침묵하는 것일 뿐 한반도 비핵화를 추구하는 기존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는 취지인데, 이를 중국이 아니라 한국 정부가 연이어 강조하는 모양새다.
그러나 정작 중국이 앞서 보여 온 행보는 정부 설명과는 온도 차가 적잖다. 북핵 묵인론이 본격화한 것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최근 방북 결과 때문이다. 시진핑은 지난 8일부터 1박 2일간 평양을 찾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가졌지만, 회담 발표문에 북핵 문제를 포함한 한반도 관련 언급은 전혀 없었다. 이는 2019년 첫 방북 당시 “조선반도 비핵화를 지지한다”며 건설적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를 비쳤던 것과는 확연히 달라진 태도다.
이와 관련, 지난 17일 서울에서 열린 한·중 국장급 협의에서 한국 측은 중국의 북핵 묵인설이 확산하는 것에 우려를 표하면서 “북·중 관계 발전이 한반도 평화와 안정에 기여할 수 있도록 기대하고, 중국이 한반도 정세 진전을 위해 건설적 역할을 지속해 달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이틀 뒤인 19일 중국 외교부는 ‘하나의 중국’ 입장을 존중한다고 밝힌 한국의 대만 관련 발언만 부각했을 뿐 북핵 문제는 또 침묵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0일 "조선노동당 총비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장 김정은동지의 초청에 의하여 우리 나라를 국가방문하였던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습근평(시진핑) 동지가 6월 9일 오후 전용기로 평양을 출발하였다"며 "김정은동지께서 리설주 여사와 함께 습근평동지와 팽려원(펑리위안) 여사를 평양국제비행장에서 환송하시였다"고 보도했다. 뉴스1
반대로 한·미 확장억제에 대해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중국 외교부는 지난 18일 최근 미·일 확장억제대화(EED)와 한·미 핵협의그룹(NCG) 회의가 연달아 열린 데 대해 “확장억제는 냉전의 산물”이라고 비판했다. 또 한국을 겨냥해 “신중하게 행동하고 지역의 안정에 도움이 되는 일을 많이 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눈길을 끈 것은 북한의 호응이었다. 김정은은 사흘 뒤 열린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NCG를 “핵전쟁 기구”로 규정하며 중국의 비판에 보조를 맞췄다. 이어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 보유 추진을 겨냥해 “조선반도 정세를 극도로 악화시키고 있다”며 “세계를 압도할 수준을 목표로 핵무력 강화를 멈춤 없이 실행하라”고 지시했다.
한·미의 확장억제를 비판한 중국의 논리를 북한이 곧장 핵무력 강화의 명분으로 차용한 셈이다. 북·중이 비슷한 메시지를 연달아 내놓은 건 중국의 북핵 묵인 의혹에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북핵에 대응하기 위한 확장억제 강화를 문제삼는 본말전도의 억지 주장을 짜기라도 한 듯 함께 반복하는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 2015년 중국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열린 ‘중국 항일 및 세계 반(反)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 기념행사(전승절)’에 참석해 인민해방군의 열병식을 지켜보고 있다. 오른쪽부터 장쩌민 전 국가주석, 시진핑 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박 전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가 중국 역할론을 고수하자, 외교가에선 과거 사례들이 다시 거론된다. 상대국의 실제 입장과 달리 ‘희망회로’를 돌리다 냉정한 현실에 직면하는 경우가 반복돼 왔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 때가 대표적이다. 박 전 대통령은 2015년 9월 중국 베이징 천안문 망루에 올라 시진핑과 함께 전승 70주년 기념 열병식을 참관했다. 미국의 동맹국 정상 중 박 전 대통령이 유일하게 행사에 참석했다. 중국에 이 같은 파격적인 예우를 보인 건 당시 한·중 관계 강화를 통해 비핵화를 위한 중국의 역할을 견인하겠다는 구상 때문이었다.
넉 달 뒤인 2016년 1월 6일 북한은 4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사태 직후 박 전 대통령은 대북 제재 강화를 위한 중국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시진핑에게 긴급 전화 통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중국은 핫라인 가동을 거부했다.
박 전 대통령은 직후인 1월 13일 신년기자회견에서 “어려울 때 손 잡아주는 게 최상의 파트너”라며 사실상 시진핑에 서운함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국익에 따라 사드배치 여부를 검토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사드발 한·중관계 악화의 시작점이었다.
2018년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 김정은 문재인. 한국공동사진기자단
이와 관련 고위급 외교관 출신인 조구래 세종연구원 객원연구위원은 통화에서 “중국의 중재 외교에 기대하는 게 얼마나 허황한 일인지는 이미 지난 경험을 통해 충분히 익힐 수 있었다”며 “ 중국의 중재는 분쟁 해결보다 자국 이익 관리의 수단으로 봐야 한다. 한반도 북핵 문제는 중국식 중재 외교의 대상에서 이미 오래전에 제외된 이슈로, 자국의 전략적 안보 이슈라는 관점에서 다뤄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