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의 GL(걸즈 러브·여성 간 로맨스) 드라마 '더 시크릿 오브 어스'의 주인공을 맡은 배우들. 왼쪽부터 옴 콘나팟, 링링 퀑. 사진 X(옛 트위터) 캡처
태국에서 만든 동성 간 로맨스 드라마가 아시아 콘텐트 시장을 사실상 장악했다는 외신 보도가 나왔다. 동성 로맨스를 거부감 없이 풀어내는 스토리텔링과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이 시너지 효과를 낸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블룸버그통신은 최근 보도에서 태국의 ‘BL(보이즈 러브·남성 간 로맨스)’와 ‘GL(걸즈 러브·여성 간 로맨스)’를 다룬 드라마가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현상을 조명했다.
태국은 연간 약 100편의 BL·GL 드라마를 제작하며 아시아 전체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블룸버그는 “제작 규모 면에서 한국, 일본, 대만을 모두 합친 것보다 앞서 있다”고 전했다.
이 같은 추세에 힘입어 BL·GL 드라마 시장은 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분야로 꼽힌다. 태국 상업은행(SCB) 산하 경제연구소(EIC)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성장률 두 자릿수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기준 시장 규모도 약 50억 바트(약 1억4977만 달러, 약 2311억원)에 달한다.
특히 BL·GL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태국에서 ‘국민 스타’ 대접을 받고 있다. 이들은 태국 뿐 아니라 뉴욕과 상파울루, 시드니 등 세계 각지에서 팬미팅을 열거나 명품 브랜드 행사에 참석하는 등 뜨거운 인기를 누리고 있다.
최대 해외 시장은 중국이다. 중국은 성소수자 콘텐트에 대한 규제가 엄격한 나라다. 하지만 중국 팬들은 가상사설망(VPN)을 이용해 태국 동성 간 로맨스 드라마를 몰래 시청하고 있다고 한다.
태국 BL(보이즈 러브·남성 간 로맨스) 드라마인 '스페어 미 유어 메르시'의 포스터. 주연은 배우 토 타나폽 리라타나카촌(왼쪽)과 크리사나품 피분송크람이 맡았다. 사진 X(옛 트위터) 캡처
태국의 동성 간 로맨스 드라마가 국경을 넘어 인기를 끄는 이유는 우선 동성 로맨스를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전개 방식이 거론된다. 커밍아웃이나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 등 민감할 수 있는 주제를 다루지만, 동성 커플을 로맨스물이나 시대극, 타임슬립물 등의 주인공으로 배치하는 방식으로 시청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노골적인 스킨십 장면은 지양하고 대신 인물 간 감정 교류에 집중하는 것도 태국 동성 간 로맨스 드라마를 거부감 없이 시청할 수 있게 해 주는 요인으로 꼽힌다.
태국 동성 간 로맨스 드라마는 성소수자뿐 아니라 이성애자 시청자들에게도 폭넓은 호응을 얻고 있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특히 젊은 여성 시청자들이 기존 로맨스물보다 섬세한 감정 표현과 전통적인 성 역할에서 벗어난 현실도피적 판타지에 매력을 느끼는 것으로 분석됐다.
무엇보다 정부 차원의 전략적 지원이 태국 BL·GL 드라마의 성공에 큰 역할을 했다. 태국은 동남아시아 최초로 동성 결혼을 합법화한 나라다. 태국 당국이 성소수자 친화적인 국가 이미지를 적극 홍보하고자 전략적으로 BL·GL 드라마를 국가 차원의 소프트파워 산업으로 육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엔터테인먼트 업계 차원의 ‘오프스크린(Off-screen)’ 전략도 흥행을 뒷받침하고 있다. 드라마가 끝난 뒤에도 작품 속 커플들이 실제 연인처럼 보이도록 하면서 팬미팅과 광고, 굿즈 판매 등을 함께하고 팬덤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태국 정부는 2027년까지 BL·GL 산업 규모를 두 배로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영화·드라마 등 콘텐트 제작에 대한 현금 환급(캐시 리베이트) 제도를 확대하는 등 관련 산업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