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품귀로 애플이 맥북, 아이패드 등 제품 가격 인상을 단행했다. 사진은 지난 26일 가격 인상 안내문을 부착한 서울 시내 애플 기기 판매점 모습. [연합뉴스]
“부품 가격이 이렇게 큰 폭으로, 이렇게 빠르게 오른 것은 처음이다.”
애플이 지난 25일(현지시간) 맥북·아이패드 일부 제품 가격을 올리면서 배포한 성명의 한 대목이다. 애플조차 메모리값 급등을 더는 감당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물가를 낮추는 기술로 여겨졌던 인공지능(AI)이 정작 물가를 강하게 밀어올리는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28일 로이터에 따르면 애플은 메모리·스토리지 칩 비용 급등을 이유로 일부 제품값을 올렸다. 아이폰을 뺀 대부분 제품의 가격표가 바뀌었다. 맥북 네오 시작가는 599달러(약 92만원)에서 699달러(약 108만원)로, 맥북 에어는 1099달러(약 170만원)에서 1299달러(약 200만원)로 올랐다. 맥 스튜디오(M3 울트라)는 3999달러(약 616만원)에서 5299달러(약 814만원)로 1300달러(33%)나 뛰었다.
김주원 기자
배경에는 AI 데이터센터 투자 경쟁이 있다. 데이터센터에는 그래픽처리장치(GPU)·서버·고대역폭메모리(HBM)·D램·낸드·전력·냉각설비가 필요하다. AI용 메모리 수요가 급증하자 생산능력이 데이터센터용 제품에 우선 배정됐고, 범용 메모리와 저장장치 가격까지 밀어 올렸다.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D램 가격은 올 1분기 최대 98% 급등한 데 이어 2분기에도 58~63% 추가 상승할 전망이다.
전력 비용도 전가되고 있다. 미국 최대 전력망 운영사 PJM 관할 지역에서는 데이터센터 수요 급증으로 평균 가정의 전기요금이 2028년까지 월 70달러가량으로 오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올해 6월부터 1년간 일부 고객 요금은 1.5~5% 인상될 것으로 예상되고, 2033년까지 누적 추가 용량비용은 최대 1630억 달러로 추산된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데이터센터 전력소비가 2024년 415TWh에서 2030년 945TWh로 두 배 남짓으로 늘어 세계 전력소비의 약 3%에 이를 것으로 봤다.
통화정책의 셈법까지 흔들고 있다. 글로벌 채권운용사 핌코는 보고서에서 “AI 투자와 자산효과가 수요를 떠받치는 동시에 공급 제약과 맞물려 미 연방준비제도(Fed)의 물가 판단을 흐리게 한다”고 지적했다. 케빈 워시 Fed 의장도 미묘하게 물러섰다. 워시 의장은 지난해 11월 월스트리트저널 기고에서 “AI는 강력한 디스인플레이션(물가 상승률 둔화) 요인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지난 17일 기자회견에서는 “AI 투자 비용은 이미 국내총생산(GDP)에 잡히지만 정작 물가를 낮출 생산성 향상이 언제, 얼마나 나타날지는 불확실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6월 FOMC 점도표에서 Fed 위원 18명 중 9명은 연내 금리 인상 가능성을 전망했다.
드비어그룹의 나이절 그린 CEO는 “마이크론 실적은 AI 붐의 이익이 공급망에서 나온다는 것을, 애플 가격 인상은 그 비용이 소비자에게 전가된다는 것을 동시에 보여준다”고 짚었다. LSE 비즈니스 리뷰도 “AI의 물가 효과가 초기 인플레이션, 중간 병목, 장기 디스인플레이션 순서로 나타날 수 있다”며 “지금은 그 첫 단계에 가깝다”고 분석했다.
한국은 이 논쟁의 한복판에 있다. 메모리값 폭등은 전 세계 소비자에겐 물가를 올리는 악재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는 수출 호재다. 문제는 그 호재가 다시 물가로 돌아온다는 데 있다. 반도체 호황이 성과급과 임금 기대, 자산시장으로 번지면 국내 물가에도 상방 압력으로 작용한다. 해외에서 시작된 AI 비용 압력이 국내 물가 압력으로 되돌아오는 ‘메모리 패러독스(역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