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현지시간) 베네수엘라 한 도시에서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 벽화 아래 지진 피해자들이 누워 있다. AP=연합뉴스
베네수엘라를 강타한 강진에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이 소환됐다. 차베스 정권 시절부터 누적된 포퓰리즘 정책과 군사 독재의 잔재가 국가 재난 대응 체계를 허물었다는 비판이 커지면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28일(현지시간) “차비스모(Chavismo, 차베스주의)의 암울한 유산이 베네수엘라의 지진 대응을 가로막고 있다”며 “연쇄 강진에 대한 부실한 대응으로 사람들의 분노가 커지면서 현 정부가 출범한 이후 가장 혹독한 시험대에 올랐다”고 보도했다. 베네수엘라는 지난 24일 북부 카리브해 연안에서 발생한 규모 7.2와 7.5의 연쇄 강진으로 막대한 인명·재산 피해를 입었다.
베네수엘라 당국에 따르면 28일 기준 사망자는 1450명, 부상자는 3150명으로 집계됐다. 이재민도 1만2721명을 넘어섰다. 실종자는 최소 7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유엔 산하기구의 초기 분석에 따르면 이번 지진으로 약 67억 달러(약 10조3000억원)의 경제적 피해가 발생했고 수도 카라카스 주민 200만 명을 포함해 최대 676만 명이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산된다.
28일 베네수엘라 라과이라주에서 자원봉사자들과 구조대원들이 실종자를 수색하고 있는 모습. AFP=연합뉴스
문제는 구조 작업이 지나치게 더디다는 점이다. 이미 생존율이 급격히 떨어지는 ‘72시간 골든타임’마저 지나버렸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날 “생존자 구조에 필요한 중장비가 심각하게 부족한 상황”이라며 현장의 참상을 전했다. 최대 피해 지역인 라과이라주 등에서는 이재민과 자원봉사자들이 매몰된 이들을 구하기 위해 맨손으로 콘크리트 잔해를 파헤치는 사투를 벌이고 있다. 영국 가디언 등 외신에 따르면 카라카스의 영안실은 밀려드는 시신들로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졌다.
이같은 무능에 민심은 폭발했다. 니콜라스 마두로 전 대통령 축출 이후 정권을 잡은 델시 로드리게스 임시 대통령은 지난 26일 카라카스의 구조 현장을 점검하던 중 주민들의 거센 야유를 받았다. 정권 교체에도 민생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은 데다 재난 앞에서 무력한 국가 시스템까지 드러나면서 시민들의 분노가 정권을 향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2010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남미국가연합(UNASUR) 회의에 참석한 차베스 당시 대통령(왼쪽)과 니콜라스 마두로 외무장관. AFP=연합뉴스
전문가들은 이번 재난을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1999년 차베스 정권 출범 이후 27년간 누적된 정부 실패가 드러난 인재(人災)로 평가한다. 차베스 전 대통령은 막대한 석유 수입을 바탕으로 공공주택 건설과 의료·복지 확대 등 포퓰리즘 정책에 대규모 재정을 투입했지만 국가기관의 기능과 시장 질서는 오히려 약화됐고, 건축 안전 규정과 감독 체계도 사실상 무력화됐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이번 지진으로 붕괴된 공공주택 상당수는 건설 당시 차베스 정권의 비호 아래 건축 기준과 안전 검사가 조직적으로 무시되거나 형식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안전 문제를 제기하며 정밀 진단을 요구했던 전문가들은 투옥 협박까지 받았다고 FT는 전했다.
지난 3월 12일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임금 및 연금에 대한 항의 시위 도중 사람들이 차베스 전 대통령을 묘사한 벽화 옆을 지나가고 있다. EPA=연합뉴스
차베스·마두로 정권을 거치며 군의 역할이 국민의 생명을 구하는 재난 대응보다 반정부 시위를 진압하고 정권을 유지하는 ‘내부 안보’에 치우친 점도 문제로 꼽힌다. FT는 “베네수엘라 정부는 국민적 위기를 극복하는 것보다 정권 유지를 최우선 과제로 삼아왔다”며 “군과 정보기관을 반정부 시위 진압에 동원했고 재난 대응 장비보다 시위 진압용 물대포를 먼저 구매했다”고 분석했다.
미국 노스텍사스대의 올랜도 페레스 교수는 FT에 “차비스모의 유산이 지진 대응 과정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며 “이번 재난은 20년 넘게 이어진 제도적 퇴행의 결과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소방관들은 적절한 장비조차 갖추지 못했고 병원은 바닥에 누운 환자들로 넘쳐난다”며 “건축 법규가 집행되지 않거나 무시된 결과 건물들이 납작하게 무너져 내렸다”고 덧붙였다.
지난 27일 베네수엘라 라과이라주에서 지진으로 인해 붕괴된 건물에서 희생자를 수색하고 있는 모습. AFP=연합뉴스
이번 베네수엘라 강진은 최근 세계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는 지진 활동과 맞물려 관심을 끌고 있다. 베네수엘라 강진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일본, 필리핀 등에서 연이어 지진이 발생한 데 이어 29일에는 중국 남서부 쓰촨성에서도 규모 5.5의 지진이 관측됐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이번 지진으로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으며 13명이 경상을 입어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에 따르면 이달(29일 기준) 전 세계에서 발생한 규모 5.0 이상 지진은 총 166회로 집계됐다. 규모 6.0 이상도 19회 발생해 2000~2021년 월평균 발생 횟수인 약 9.3~17.1회를 넘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