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물등급위원회(영등위)가 올해로
창립 60주년을 맞았다.
영등위의 역사는 제3공화국 시절 출범한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1966~1976)로 시작한다. 이후 공연윤리위원회(1976~1997), 한국공연예술진흥협의회(1997~1999) 시기를 거쳐 1999년부터 민간 독립 기구인 영등위로 자리 잡았다.
역할과 기능의 변화도 컸다. 희곡과 음반, 영화 시나리오 등에 대한 엄혹한 사전 검열에서 시작했지만, 1996년 사전 심의가 위헌이라는 헌재 판결이 난 뒤 1999년부터 지금까지 영화·비디오물(및 그 광고·선전물)에 대한 연령별 등급 분류 업무를 해왔다. 공연은 1997년 민간 자율 심의 체제로 전환됐고, 게임물과 음반 관리는 2006년 각각 게임물등급위원회, 국가청소년위원회에 이전됐다.
룸펜 청년의 자살을 그린 이만희 감독의 영화 ‘휴일’(1968)은 “이런 작품은 안 만드는 게 좋다”는 당국의 막무가내 판정 탓에 각본 심의만 3차례 반려됐고, 당국의 지적 사항을 반영해 촬영을 마쳤지만 끝내 개봉을 포기했다. 37년 뒤 극적으로 필름이 발견된 이 영화는 ‘한국 모더니즘 영화의 대표작’으로 재평가됐다.’[한국영상자료원 제공=연합뉴스]
조준형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은 “검열은 어디까지 볼 수 있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끊임없이 기준선을 만들어온 과정”이라며
“영등위의 역사는 우리 사회가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정치적·윤리적 의식과 감각의 변천사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시사점이 크다”고 짚었다.
군사정권 시절을 관통한 사전 검열 시대의 심의 기준은 국헌 문란 및 국가 위엄 손상, 타인의 작품 표절, 범죄 행위 정당화, 미신 조장 등이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기준이다.
이만희·김기영·이두용 등 스타 감독들도 검열의 희생양이 됐다.
이두용 감독의 영화 '최후의 증인'(1980). 배우 최불암(사진)이 출연한 이 영화는 검열로 상영시간의 40%가 잘려나가는 고충을 겪었다. 2017년 베를린영화제 포럼 부문에서 복원판이 재조명돼 호평 받았다. 중앙포토
심의 결과가 번복되는 일도 있었다. 이장호 감독의 영화 ‘어우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
어우동’은 1985년 공연윤리위원회 사전심의에 통과했지만 서울 단성사에서 상영 도중 돌연 필름이 압수되는 일을 당했다. 영상자료원 조준형 연구원은 “이장호 감독이 이 사건에 대해 ‘누군가 ‘어우동’이 권력층을 조소하고 민중주의를 유포하는 영화라고 투서를 넣었다’고 증언했다”고 전했다. 결국 ‘어우동’은 성종을 희롱하는 밀회 장면 등이 강제 삭제된 채 상영을 재개했다.
영화 '어우동'은 사전 검열 시기 심의 기준의 편파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심의를 통과해 개봉했지만, 뒤늦게 당국이 주제 의식을 문제삼으면서 개봉 중이던 필름을 압수해 일부 장면을 삭제하기도 했다. 사진 태흥영화
이후 공연윤리위원회는
1986년 서울·부산·대구·광주·대전·제주 등
전국 6개 도시에 30~40대 어머니들을 모아 폭력·외설물을 적발하는 모니터반을 상설 운영하며 감시망을 강화했다. 불량·불법 복제 비디오가 기승을 부리면서, 문화부(현 문화체육관광부)가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마마·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란 문구로 유명한 건전 비디오 광고를 배포한 게 이 즈음부터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공연윤리위원회도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첫 걸음을 뗐다. 이듬해 올림픽을 계기로 그간 금지됐던 공산권 및 미수교국 작품도 이념상 문제가 없을 경우 수입할 수 있게 됐다.
1993년엔 동성애 소재 영화 ‘크라잉 게임’이 훼손 없이 개봉 허가받았고, 1994년엔 ‘태백산맥’ ‘전함 포템킨’ ‘데미지’ 등 문제작들이 일부 장면 삭제 등의 조처로 심의를 통과하는 전향적 변화가 일어났다. 공연윤리위원회가 급변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 파격적 결정을 내렸던 시기다.
1993년 동성애 소재 영화 '크라잉 게임'이 훼손 없이 개봉 허가 받는 등 공연윤리위원회가 전향적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사진 율가필름
하지만 사전 검열 철폐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심의를 받지 않고 상영을 강행한 5·18 광주민주화운동 소재 영화 ‘오! 꿈의 나라’(1989)의 제작사가 영화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고, 역시 심의를 받지 않고
‘92년, 장마, 종로에서’ 카세트테이프를 유통한 가수 정태춘이 음반비디오물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는 등의 사건이
사전심의 폐지 여론에 불을 붙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4집 수록곡 '시대유감'의 가사 수정 지시 및 불가 판정에 항의해 노랫말 없이 연주곡만 담은 채 음반을 발매하며 사전 심의 폐지 여론에 불을 붙였다. 사진은 1995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시대유감'이 수록된 4집 앨범 '컴백 홈'을 발표하는 MBC-TV특집 공개방송에서 공연하고 있다. 사진 MBC
사전 심의 위헌 판결 이후 발족한 영등위도, 2002년에야 검열 시대의 잔재를 털어냈다. 2001년 헌재가 영등위의 ‘등급분류 보류’ 제도가 헌법이 금지하는 ‘사전검열’에 해당하여 위헌이라고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때까지 등급 보류 판정을 받으면 영화 상영 자체가 아예 불가능했다. 1999년 ‘노랑머리’ ‘거짓말’ ‘둘 하나 섹스’ 등이 등급 보류 판정을 받았다. 위헌 판결 후 2002년부터는 제한상영가 등급이 신설돼 연령별 등급만을 분류하는 완전등급제가 마련됐다. 그러나
제한상영가 전용관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으면서, 여전히 상영 불가 판정이나 다름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시행 첫해에
다큐멘터리 ‘죽어도 좋아!’(2002)가 국내 개봉을 앞두고 노부부의 성생활을 솔직하게 담은 장면 탓에 제한상영가를 받자, 영화계 전체가 반발하기도 했다.
칸영화제에서 호평 받은 다큐멘터리 ‘죽어도 좋아’가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자, 박찬욱 감독은 당시 영화잡지 ‘씨네21’ 특집 기고문을 통해 “성기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미술사의 숱한 걸작은 뭐냐”는 일침을 놓기도 했다. 지난 17일 재개봉한 칸영화제 수상 영화 ‘피아니스트’(2001)가 제한상영가를 받고 문제 장면을 흐리게 처리한 버전으로 청불 등급을 다시 받는 등 논란은 지금껏 계속되고 있다. 영등위측은 “제한상영가 제도의 운영 방식과 실효성에 대해 사회적 논의와 법‧제도적 검토가 필요하다”고 입장을 전했다. 사진 청어람
영등위는 30일 그랜드조선 부산 호텔에서 창립 60주년 특별 포럼 ‘규제를 넘어 산업으로’를 열고 ▶온라인 스트리밍 플랫폼(OTT) 중심으로 안착돼온 자체 등급분류 제도의 발전 방향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한 등급 분류 시스템 혁신 등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
김병재 영등위 위원장은 “이제 영등위는 과거의 사전 규제 기관에서 벗어나 미디어 패러다임 변화의 핵심인 자율과 책임 중심으로 영상 산업의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며 “앞으로 AI 기술 기반의 혁신을 통해 등급분류 제도를 고도화하고, 콘텐츠 산업의 성장과 청소년 보호가 조화를 이루는 균형 있는 제도 운영에 앞장서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