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1960년초까지만 해도 정주영 당시 현대건설 사장은 삼성의 공사를 따내기 위해 굽신거려야 했던 ‘구멍가게’ 수준의 건설사 대표일 뿐이었다.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은 그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을 시절이다.
그러나 현대는 경부고속도로·소양강댐·조선소 건설 등 국가 기간사업을 잇달아 성공시키며 급성장했다. 1976년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수주하며 중동 건설 붐을 선도하며 규모를 키웠다. 여기에 조선·자동차·중공업까지 사업을 확장한 결과, 현대는 삼성을 제치고 재계 1위에 올라섰다. 내가 35세의 나이로 사장이 됐던 1977년의 일이었다.
본격적인 현대와 삼성의 경쟁 시대가 막을 올린 것이다. 충돌은 불가피했다.
공교롭게도 그 무렵 이 회장이 내 인사를 좋지 않게 평가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삼성 임직원들 앞에서 연설하다가 “35세 사장 임명은 무리수라 현대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는 내용이었다.
현대 재직 시절 현장을 살피고 있는 이명박 전 대통령. 사진 이명박 대통령 기념재단
나는 1977년 말 사장단 회의에서 파격인사의 의미와 정 회장의 의중을 설명했다.
" 젊은 제가 사장으로 임명되자 재계의 어느 분께서 ‘현대그룹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염려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를 기용한 정주영 회장의 판단은 즉흥적인 게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정확히 부응한 것이었습니다. 고도성장, 국제화 시대를 맞아 기업들이 체질 개선을 해야 할 때입니다. 이러한 때 정 회장이 전문경영인을 기용한 것은 앞서가는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저 자신도 많은 부담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비록 나이는 젊지만 많은 경험을 거듭하며 성장했고, 그러한 사회적 여론과 걱정을 감안해서 실망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그로부터 얼마 뒤 나는 이병철 회장을 직접 만날 기회를 가졌다.
두 거인, 마주앉다
저울은 팽팽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응시하던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균형추를 유지했다.
한쪽은 희끗희끗한 머리에 안경을 쓴 이지적 이미지, 마치 학자 같았다. 다른 쪽은 건장한 체격에 투박한 외모의 강한 이미지, 흡사 장군 같았다. 침묵 속 대치가 처절한 혈투보다 더 긴박해 보였다.
이윽고 ‘학자’ 쪽이 입을 뗐다.
" 회사를 아주 잘 키우셨더군요. 현대의 성장세를 보면 감탄만 나올 뿐입니다. "
‘장군’이 그 덕담에 응수했다.
" 아닙니다. 삼성에 비하면 아직 멀었죠. "
한국 재계의 두 거인,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함께한 식사 자리였다.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과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환담하고 있다. 중앙포토
현대와 삼성이 재계 1위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맞붙었던 1970년대 말이었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지만, 그 속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화제는 역시 당시 양사의 핵심 사업들이었다. 현대는 ‘포니’를 필두로 본격적인 자체 모델을 내놓으면서 자동차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였다. 삼성은 국내 유일의 반도체 기업인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면서 반도체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당시 이 회장은 해외 산업 흐름과 기술 변화에 관심이 많았다. 해마다 연초면 일본에 머물며 세계 경제와 산업 동향을 살폈다. 그 과정에서 선택한 게 바로 반도체였다.
" 자동차 좋죠. 그런데 그거 한 대 팔아서 얼마나 법니까. 자동차 한 대 부피의 반도체를 생산하면 자동차의 열배, 백배의 돈을 벌 수 있어요. "
그때 이미 이 회장은 반도체가 미래 산업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었다. 놀라운 혜안이었다.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될 무렵, 이 회장이 돌발 발언을 꺼냈다. 정 회장과 나는 그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