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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베푼 것을 붙잡지 않는 공부

Los Angeles

2026.06.29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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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입로 공사 허가를 알아보니, 시청에서 이웃 두 집의 서명이 필요하다고 한다. 뒷집과 아랫집이었다. 뒷집이 거절했을 때도 아쉽긴 했지만 크게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아랫집이 거절했을 때는 서운함이 없지 않았다.
 
이유를 생각해봤다. 아랫집과는 아이 때문에 왕래도 있었고, 매년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 때 선물도 빠지지 않고 전했다. 그때는 순수한 마음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내가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겼을 때 거절을 당하니, “그동안 내가 어떻게 했는데….” 일상에서 흔히 경험하는 일이다.
 
불가에서는 보시를 강조한다. 보시는 단순히 물건이나 돈을 주는 것만이 아니다. 시간, 관심, 친절, 배려도 모두 보시가 될 수 있다. 한발 더 나아가 무상보시(無相布施)를 말한다. 무상보시는 ‘내가 주었다’는 상, 곧 ‘내가 했다’는 마음의 표식을 붙잡지 않는 것이다. 내가 베풀었으니 상대가 알아주어야 한다거나, 언젠가 나에게 갚아야 한다거나, 최소한 내 편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다.
 
무상보시는 베푼 일을 완전히 잊어버리라는 뜻은 아니다. 돈을 빌려준 것인지 그냥 준 것인지, 내 형편이 어떤지, 상대가 반복적으로 의존하는지 살피는 것은 지혜다. 문제는 기억 자체가 아니라, 그 기억을 마음속 채권으로 만드는 것이다. ‘내가 해줬으니 너는 나에게 빚졌다’는 마음이 생길 때, 보시는 공덕이 아닌 거래가 된다.
 
아랫집에게 선물한 것은 선의였고, 서명을 거절한 일은 그 집의 판단이었다. 두 일을 묶어서 “은혜도 모른다”고 판단하면, 과거의 보시가 현재의 원망으로 변한다. 작은 선의가 오히려 불화의 씨앗이 되는 경우이다. 가까운 사이가 원수로 돌아서기 쉬운 이유이다.
 
무상보시는 감정이 없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서운함은 올라올 수 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생길 수 있다. 수행은 그 마음을 억지로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아차리고 더 키우지 않는 데 있다. “아, 내가 베푼 것을 붙잡고 있구나.”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공부는 시작된다.
 
보시할 때는,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은가, 내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아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가를 먼저 살펴야 한다. 아직 그렇지 못하다면 무리해서 크게 베풀 필요는 없다. 능력만큼, 감당할 만큼, 자유롭게 베푸는 것이 좋다.
 
서운한 마음이 들거나 공로감이 앞설 때, ‘그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앞으로의 관계는 지금의 지혜로 다시 판단한다.’ 베푼 일은 과거로, 판단은 현재로 돌리는 것이다. 이 한 문장이 마음을 가볍게 해 줄 수 있다. 원불교에서는 인과와 보은을 말한다. 내가 새로 복을 지었다고 생각하기보다, 이미 받은 은혜를 조금 갚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상을 내려놓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무상보시는 선행에 대한 기억상실이 아니라 집착을 놓는 연습이다. 상이 생길 때 자문해보자. ‘나는 지금 선의를 베푼 것인가, 아니면 마음속 장부를 만들고 있는가?’ 보시는 행할 때가 아니라, 붙잡지 않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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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철 교무 Won Meditation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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