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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에] 고목이 품은 연두

Los Angeles

2026.06.2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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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영아 수필가

엄영아 수필가

 산길을 오르는 발걸음은 늘 익숙하면서도 번번이 새로운 풍경을 선물한다. 그날도 오닐 리저널 파크(O‘Neill Regional Park)의 흙길을 따라 산으로 천천히 걷고 있었다. 무심히 지나칠 뻔한 길가에서 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거대한 고목 한 그루였다. 오랜 세월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몸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나무였다.
 
거칠게 갈라진 껍질과 깊게 팬 몸통에는 지나온 비바람의 시간이 켜켜이 새겨져 있었다. 이제는 생명을 다하고 조용히 대지로 돌아갈 일만 남은 듯 보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내 눈길을 붙드는 뜻밖의 풍경이 있었다. 썩어 내린 몸통 깊은 틈 사이로 연둣빛 새순 하나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거칠고 거뭇한 고목의 살결을 뚫고 나온, 금방이라도 툭 터질 듯 싱그러운 생명이었다.
 
주변의 짙은 녹음 속에서도 그 빛은 유난히 맑고 투명했다. 죽음의 흔적 위에서 피어난 어린 생명은 햇살을 향해 조용히 손을 뻗고 있었다. 거칠고 어두운 고목과 연약하도록 여린 새순이 한자리에 서 있는 모습 앞에서 나는 한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 연둣빛을 바라보며 문득 우리의 삶도 이 고목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비바람을 견디며 살아간다. 세월이 흐를수록 몸과 마음에는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남고, 때로는 삶의 한 부분이 허물어져 내리는 상실도 겪는다. 나 역시 나이가 들어가며 채우는 일보다 비워내고 내려놓는 일이 더 많아졌음을 느낀다. 오래 쥐고 있던 짐들을 하나씩 덜어내며 삶을 정돈하는 요즈음이기에, 속이 텅 빈 나무의 모습이 남 일 같지 않았다.
 
그런데 자연은 썩어가는 몸을 단순한 소멸로 남겨두지 않았다. 오래된 나무는 자신의 몸을 내어주어 어린 생명이 뿌리내릴 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생명을 품어내는 가장 깊은 자리가 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삶도 그러한지 모른다. 한 시절이 저문다는 것은 단지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다음 생명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내가 지나온 시간의 상처와 흔적들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따뜻한 그늘이 되고,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부드러운 흙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산길을 내려오며 오래도록 그 고목의 연둣빛이 마음속에서 흔들렸다. 가장 늙고 깊이 상한 자리에서도 삶은 끝내 새로운 빛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엄영아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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