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폐허를 딛고 산업화와 자유민주주의를 동시에 이룩한 대한민국은 세계가 인정하는 민주국가로 성장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전자정부와 행정 시스템은 한국의 자부심이고, 미주 한인들에게도 조국의 발전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최근 지방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선거관리 혼란은 이러한 자부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일부 지역에서는 투표용지 부족으로 유권자들이 장시간 기다리거나 투표를 포기해야 했고, 다른 지역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투표용지가 파쇄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충격이 확산했다. 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가 관리 부실과 혼선 논란에 휩싸인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일부 국민이 선거 결과보다 과정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는 절차에 대한 신뢰 위에서 작동한다. 필요한 곳에는 투표용지가 부족하고, 다른 곳에서는 투표용지가 폐기되었다면 참정권 침해를 우려하는 것은 당연하다. 선거는 공정하게 치러지는 것만큼 공정하게 보이는 것도 중요하다.
특히 송파구 선관위를 둘러싼 증거 보전 논란은 의혹을 더 키웠다. 법원의 증거 보전 명령이 내려졌음에도 적절한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선관위의 해명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됐다. 민주주의는 규정 준수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투명성과 책임성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이번 사태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세대는 2030 청년들이다. 이들은 결과보다 과정을, 권위보다 공정을 중시한다. SNS를 통해 정보가 실시간으로 공유되는 시대에 선관위의 늑장 대응과 소통 부재는 불신을 더욱 증폭시켰다. 의혹의 사실 여부를 떠나 국민의 의심을 샀다는 사실 자체가 선관위가 깊이 성찰해야 할 부분이다.
국회 국정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선관위의 태도 역시 문제다. 선거관리 개혁과 참정권 침해 의혹을 다루기 위해 열린 국정조사특별위원회에 다수의 선관위원이 증인 출석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은 또 다른 의문을 남겼다.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의 질문조차 외면한다면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민주주의는 신뢰 위에 세워진다. 선거관리 기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선거 결과에 대한 승복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는 특정 정당이나 정치 세력의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전체의 문제다.
우리에게는 이미 3·15 부정선거라는 아픈 역사적 경험이 있다. 이를 통해 선거에 대한 불신이 얼마나 큰 국민적 분열과 국가적 혼란을 초래하는지 확인했다. 따라서 이번 논란 역시 진영 논리나 정치적 유불리의 관점이 아니라 헌정 질서와 민주주의 신뢰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잘못이 있다면 책임을 물어야 한다. 모든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그것이 헌법기관의 의무이며 민주국가의 기본 원칙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쟁이 아니라 진실 규명이다. 대통령과 정부는 의혹 해소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의 원인, 파쇄된 용지의 실체, 법원 명령 이행 여부, 선거관리 전반의 문제점을 철저히 조사해 밝혀야 한다. 필요하다면 국정조사뿐 아니라 외부 감사, 사법적 검증도 마다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는 의혹을 덮는다고 지켜지지 않는다.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때 더욱 강해진다. 선관위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변명이 아니라 진상 규명과 제도 개혁이다.
대한민국의 진정한 경쟁력은 첨단 기술이나 빠른 행정에 있지 않다. 공정한 제도와 신뢰받는 선거 시스템에 있다.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는 권력이 아니라 국민의 신뢰다. 참정권의 위기는 곧 민주주의의 위기이며, 민주주의의 위기는 결국 국가 재난으로 이어진다. 대한민국은 지금 그 경고를 결코 가볍게 들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