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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는 흉내 못 낼, 가만히 들여다보기…구본창이 모은 사물ㆍ사진ㆍ사진가들

중앙일보

2026.06.30 23:33 2026.07.07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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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창, 컬렉션 18, 2019, Archival pigment print, 124x93㎝. 사진 국제갤러리

구본창, 컬렉션 18, 2019, Archival pigment print, 124x93㎝. 사진 국제갤러리

식당 계산대에 놓인 컵엔 빨간 자국이 선명했다. 주문을 받고 난 색연필을 점원이 연필꽂이로 쓰는 컵에 던져 꽂아둔 흔적이다. 수천 번, 수만 번 반복된 이 단순한 행위가 남긴 궤적이 고스란히 컵 안쪽에 쌓였다. 구본창(73)의 ‘컬렉션’ 연작이다. ‘오브제’ 연작은 와인이나 수저, 시계가 든 상자를 풀면 나오는 새틴 천 안감을 찍었다. 소중한 내용물이 빠져나간 자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천, 조연을 주연처럼 포착했다.
구본창의 '컬렉션' 시리즈가 전시된 국제갤러리 K1. 사진 안천호

구본창의 '컬렉션' 시리즈가 전시된 국제갤러리 K1. 사진 안천호

“사물을 프레임에 가두고 그 고백을 듣는 사람”(김영민 서울대 교수)이라는 평가를 받는 구본창이 눈여겨본 사물과 사진들이 지금 서울 삼청로 국제갤러리에 모여 있다. 19일까지 열리는 ‘진동하는 사물들’은 구본창 기획 사진전으로, 본인을 포함해 정희승·조성연·김수강·김경태·박찬우·구성연·정정호·조선희 등 동시대 한국 사진가 9인의 정물 사진만 모았다.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사진 기획전 '진동하는 사물들' 참여 작가들. 오른쪽부터 구본창, 정희승, 조성연, 김경태, 김수강, 구성연, 박찬우, 정정호, 조선희. 권근영 기자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사진 기획전 '진동하는 사물들' 참여 작가들. 오른쪽부터 구본창, 정희승, 조성연, 김경태, 김수강, 구성연, 박찬우, 정정호, 조선희. 권근영 기자

구본창은 “혼자만의 시간을 견디며 대상과 마주 앉아 이를 새롭게 해석하려 2,30년간 꾸준히 노력한 분들, 사물의 드러나지 않은 아름다움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사진가들을 주목했다”고 말했다.
도시 주변부에서 채집한 콘크리트 조각, 철근, 전선 따위를 아슬아슬하게 쌓아 올려 촬영한 사진을 건 조성연. 그의 ‘사라지지 않고 무언가의 일부가 된다’ 시리즈 등은 전시장 맨 앞에 있다. 권근영 기자

도시 주변부에서 채집한 콘크리트 조각, 철근, 전선 따위를 아슬아슬하게 쌓아 올려 촬영한 사진을 건 조성연. 그의 ‘사라지지 않고 무언가의 일부가 된다’ 시리즈 등은 전시장 맨 앞에 있다. 권근영 기자

그가 1988년 워커힐미술관에서 기획한 ‘사진ㆍ새 시좌(視座)’는 국내 미술관 첫 사진 기획전으로 기록됐다. 2008년엔 대구사진비엔날레 총감독을 맡기도 했다. 이번에 주목한 것은 정물. 가장 오랜 미술 장르 중 하나이기에 오히려 간과됐던 장르다. 사진이라 하면 흔히 역사적 현장의 증거, 한 인물의 기록부터 떠올리지만 전시는 남다르게 바라보고 기록하려 한 일상의 물건 이미지로 가득하다. 인공지능(AI)이 진짜 같은 가짜 이미지를 손쉽게 생성하는 시대에 ‘사진다움이란 뭔가’‘인간다움이란 뭔가’ 질문하는 전시다.
정희승의 '병렬투영'(2026) 연작이 걸린 국제갤러리 K1 전시장. 사진 안천호

정희승의 '병렬투영'(2026) 연작이 걸린 국제갤러리 K1 전시장. 사진 안천호

정희승(52)은 19세기 프랑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집 『주사위 던지기』(1897)를 사진으로 ‘번역’했다. 난파 위기에 놓인 배의 선장이 주사위를 던져 혼돈을 통제할 수 있을지 고뇌하지만 배는 결국 침몰하고 선장의 모자 위에 있던 깃털만이 떠오른다는 이야기를 이미지로 담았다. 소실점을 발생시키지 않는 투시도법인 ‘병렬 투영’을 통해 사물이 멀리 있어도 작아지지 않고 같은 크기와 비례를 유지한다. 그는 “과도한 리터칭보다는 ‘보는 노동’을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를 경험하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수강, Chemical Bottle 3, 1997, Gum bichromate print, 19.5x14.5㎝. 사진 국제갤러리

김수강, Chemical Bottle 3, 1997, Gum bichromate print, 19.5x14.5㎝. 사진 국제갤러리

김수강(56)은 돌·유리병·종이가방 같은 평범한 사물에 검프린트(gum print) 기법으로 다른 질감을 입힌다. 종이에 물감을 넣은 용액을 바르고 빛을 쬐어 물속에서 현상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색조를 구현하는 정교한 수작업이다. “마음 놓고 오래 볼 수 있어서 정물만 찍는다”는 그는 “멋있는 풍경을 찍어 사진으로 걸면 실제보다 작아 보이는데, 정물은 사소한 것을 더욱 커 보이게 한다”고 말했다.
김경태는 8㎜ 너트를 대형 사진으로 키웠다. 권근영 기자

김경태는 8㎜ 너트를 대형 사진으로 키웠다. 권근영 기자

김경태(43)는 손톱만 한 너트를 세로 225㎝ 사진으로 키웠다. 수백장의 사진을 촬영한 뒤 각 사진에서 초점이 가장 선명하게 맞는 부분만 합성하는 ‘포커스 스태킹’ 기법을 통해 화면의 모든 지점에 고르게 초점이 맞는 선명한 이미지를 만들었더니, 너트가 달리 보인다.
민화 '책가도'에서 영감을 얻어 책장 위에 일상 용품들을 늘어 놓고 중첩해 찍은 박찬우의 '23111ws'(2023). 사진 국제갤러리

민화 '책가도'에서 영감을 얻어 책장 위에 일상 용품들을 늘어 놓고 중첩해 찍은 박찬우의 '23111ws'(2023). 사진 국제갤러리

조성연(55)은 도시의 주변부에서 채집한 콘크리트 조각, 철근, 전선, 기계 부품, 식물의 잔해 등을 불안정하게 재조립해 그 일시적인 균형을 카메라에 담았다. 박찬우(63)는 조선 시대 민화 책가도처럼 책장에 일상용품들을 들어놓고 중첩 촬영해 시간·경험·기억이 덧대어진 듯한 이미지를 만든다. 구성연(56)은 설탕으로 정교하게 만든 보물과 장신구를 촬영한다. 달콤하고 반짝이지만 이내 사라질 운명을 지닌 설탕 오브제 사진은 그 자체로 욕망과 소멸의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구성연의 '설탕' 시리즈는 설탕을 녹여 그릇과 장신구 등 아름다운 오브제를 만든 뒤 이를 촬영했다. 권근영 기자

구성연의 '설탕' 시리즈는 설탕을 녹여 그릇과 장신구 등 아름다운 오브제를 만든 뒤 이를 촬영했다. 권근영 기자

정정호(45)는 죽을 고비를 넘긴 자신의 경험과 전쟁을 겪은 할아버지의 죽음을 사진에 담았다. 보이지 않는 죽음을 연결하는 매개물은 바닷가에서 모은 옷가지, 탄피, 끈, 철사 등이다. 유명인들의 인물 사진으로 잘 알려진 조선희(55)는 이번 전시에 시들어가는 꽃에 검은 안료를 입혀 촬영한 ‘블랙 이마고’(2024~2025)와 부패해 형태를 잃어가는 과일들을 작은 행성처럼 포착한 ‘플래닛’(2024~2025) 시리즈를 내놓았다. 아버지와 할머니의 죽음 이후 소멸의 의미를 탐구하게 된 그에겐 기능을 다 한 뒤에도 지속되는 생명의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서 본 '설탕' 시리즈. 권근영 기자

가까이서 본 '설탕' 시리즈. 권근영 기자

가만히 들여다봐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작가의 요건은 그런 것들을 비범하게 포착해 내는 눈과 교감에 있다고 조용히 말하는 전시다.



권근영([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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