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 계산대에 놓인 컵엔 빨간 자국이 선명했다. 주문을 받고 난 색연필을 점원이 연필꽂이로 쓰는 컵에 던져 꽂아둔 흔적이다. 수천 번, 수만 번 반복된 이 단순한 행위가 남긴 궤적이 고스란히 컵 안쪽에 쌓였다. 구본창(73)의 ‘컬렉션’ 연작이다. ‘오브제’ 연작은 와인이나 수저, 시계가 든 상자를 풀면 나오는 새틴 천 안감을 찍었다. 소중한 내용물이 빠져나간 자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천, 조연을 주연처럼 포착했다.
“사물을 프레임에 가두고 그 고백을 듣는 사람”(김영민 서울대 교수)이라는 평가를 받는 구본창이 눈여겨본 사물과 사진들이 지금 서울 삼청로 국제갤러리에 모여 있다. 19일까지 열리는 ‘진동하는 사물들’은 구본창 기획 사진전으로, 본인을 포함해 정희승·조성연·김수강·김경태·박찬우·구성연·정정호·조선희 등 동시대 한국 사진가 9인의 정물 사진만 모았다. 구본창은 “혼자만의 시간을 견디며 대상과 마주 앉아 이를 새롭게 해석하려 2,30년간 꾸준히 노력한 분들, 사물의 드러나지 않은 아름다움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사진가들을 주목했다”고 말했다.
국내 미술관 첫 사진 기획전인 ‘사진·새 시좌(視座)’(1988·워커힐미술관)를 기획하고, 2008년 대구사진비엔날레 총감독을 맡기도 했던 그가 이번에 주목한 것은 정물. 가장 오랜 미술 장르 중 하나이기에 오히려 간과됐던 장르다. 사진이라 하면 흔히 역사적 현장의 증거, 한 인물의 기록부터 떠올리지만 전시는 남다르게 바라보고 기록하려 한 일상의 물건 이미지로 가득하다. 인공지능(AI)이 진짜 같은 가짜 이미지를 손쉽게 생성하는 시대에 ‘사진다움이란 뭔가’‘인간다움이란 뭔가’ 질문하는 전시다.
김수강의 ‘Chemical Bottle 3’(1997). [사진 국제갤러리]
정희승(52)은 19세기 프랑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집 『주사위 던지기』(1897)를 사진으로 ‘번역’했다. 김수강(56)은 돌·유리병·종이가방 같은 평범한 사물에 검프린트(gum print) 기법으로 다른 질감을 입힌다. 종이에 물감을 넣은 용액을 바르고 빛을 쬐어 물속에서 현상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색조를 구현하는 정교한 수작업이다. “마음 놓고 오래 볼 수 있어서 정물만 찍는다”는 그는 “멋있는 풍경을 찍어 사진으로 걸면 실제보다 작아 보이는데, 정물은 사소한 것을 더욱 커 보이게 한다”고 말했다.
박찬우의 중첩 이미지 ‘23111ws’(2023). [사진 국제갤러리]
김경태(43)는 손톱만 한 너트를 세로 225㎝ 사진으로 키웠다. 수백장의 사진을 촬영한 뒤 각 사진에서 초점이 가장 선명하게 맞는 부분만 합성하는 ‘포커스 스태킹’ 기법을 통해 화면의 모든 지점에 고르게 초점이 맞는 선명한 이미지를 만들었더니, 너트가 달리 보인다. 박찬우(63)는 조선 시대 민화 책가도처럼 책장에 일상용품들을 들어놓고 중첩 촬영해 시간·경험·기억이 덧대어진 듯한 이미지를 만든다. 구성연(56)은 설탕으로 정교하게 만든 보물과 장신구를 촬영한다. 달콤하고 반짝이지만 이내 사라질 운명을 지닌 설탕 오브제 사진은 그 자체로 욕망과 소멸의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설탕으로 장식품을 만들어 찍은 구성연의 ‘설탕_07’(2015). [사진 국제갤러리]
정정호(45)는 옷가지·탄피·끈·철사를 매개로 죽을 고비를 넘긴 자신의 경험과 전쟁을 겪은 할아버지의 죽음을 사진으로 다뤘다. 유명인들의 인물 사진으로 잘 알려진 조선희(55)는 이번 전시에 시들어가는 꽃에 검은 안료를 입혀 촬영한 ‘블랙 이마고’(2024~2025)와 부패해 형태를 잃어가는 과일들을 작은 행성처럼 포착한 ‘플래닛’(2024~2025) 시리즈를 내놓았다. 아버지와 할머니의 죽음 이후 소멸의 의미를 탐구하게 된 그에겐 기능을 다 한 뒤에도 지속되는 생명의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조선희의 ‘블랙 이마고 170823’(2025). [사진 국제갤러리]
가만히 들여다봐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작가의 요건은 그런 것들을 비범하게 포착해 내는 눈과 교감에 있다고 조용히 말하는 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