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1년, 유럽을 뒤덮은 공장의 굴뚝 연기 속에서 교황 레오 13세는 회칙 하나를 발표했다. 제목은 『레룸 노바룸(Rerum Novarum)』, ‘새로운 것들에 관하여’였다. 산업혁명이 인간을 기계의 부품으로 만들던 시대, 12시간 노동과 아동 착취가 ‘시장의 법칙’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던 그 시대에 교회는 노동자의 존엄을 신학의 언어로 선언했다.
그로부터 135년이 지난 2026년 5월 25일 바티칸 시노드 홀에서 교황 레오 14세가 다시 말한다. 이번에 그가 선 자리는 굴뚝이 아니라 서버룸 앞이다. 두 교황의 이름이 모두 ‘레오’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닌 깊은 신학적 상징으로 읽을 수 있다. 사자(Leo)는 말한다. 시대가 바뀌어도 교회의 목소리는 멈추지 않는다고.
『마니피카 휴마니타스(Magnifica Humanitas)』는 『레룸 노바룸』의 직계 후손이다. ‘간추린 사회교리’로 이어지는 가톨릭 사회교리의 흐름 안에서, 두 문서는 서로 다른 혁명 앞에 서 있지만 동일한 신학적 확신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도구가 아니다. 레오 13세가 맞선 것은 자본이 인간의 몸을 착취하는 현실이었다. 레오 14세가 맞선 것은 알고리즘이 인간의 지성을 모사하고 대체하려는 현실이다.
착취의 방식은 달라졌지만, 교회의 응답은 한 줄기다. 인간은 생산 단위도, 데이터 노드(data node, 데이터망의 한 접속점)도 아니다. 19세기에는 방직 공장이, 21세기에는 데이터 센터가 인간을 수단으로 삼으려 한다. 효율의 언어가 인간의 언어를 지우려 할 때마다, 교회는 같은 말을 꺼낸다. 인간은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다.
두 회칙의 신학적 공통 구조는 선명하다. 기술의 가치는 인정하되 인간 위에 둘 수 없으며, 인간 존엄의 근거는 시장도 알고리즘도 아닌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도 있다. 교회는 기술 혁명이 가장 격렬할 때 침묵하지 않는다.
『레룸 노바룸』이 인간의 ‘몸’과 ‘노동’을 지켰다면, 『마니피카 휴마니타스』는 더 나아가 인간의 자유의지, 양심, 타자를 향한 사랑의 능력 전체를 지키려 한다. 산업혁명이 인간의 손발을 위협했다면, AI 혁명은 인간의 마음과 관계 방식 자체를 위협한다. 위협의 전선이 영혼까지 포괄하는 차원으로 확장된 만큼, 응답도 더 깊고 근본적일 수밖에 없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교회 제도와 전례에서 갈라섰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선언 앞에서는 하나다. 두 전통이 오늘 같은 목소리를 낸다는 사실 자체가 이 위기의 심각성을 방증한다.
성경은 두 선언의 공통 뿌리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 1:27). 산업혁명도 AI 혁명도 이 선언을 무효로 만들 수 없다. 기계가 인간의 팔을 대신할 때도, 알고리즘이 인간의 언어를 모사할 때도, 그 형상은 지워지지 않는다.
『마니피카 휴마니타스』는 여기에 요한복음의 빛을 더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 하나님은 몸을 통해 세상에 오셨다. AI가 꿈꾸는 것은 몸 없는 지성, 상처 입지 않는 언어다. 그러나 성육신의 신학은 말한다. 몸의 취약성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결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신 방식의 핵심이라고. 알고리즘은 이 자리에 오지 못한다.
『마니피카 휴마니타스』의 가장 깊은 울림은 여기 있다. 교회는 기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다만, 기술이 인간을 정의하려 할 때 교회는 말한다. 135년 전 『레룸 노바룸』이 공장의 시대에 선언했듯, 오늘 『마니피카 휴마니타스』는 알고리즘의 시대에 선언한다.
새로운 것들이 밀려올 때마다, 교회는 가장 오래된 진실을 꺼낸다. 기계가 인간의 손을 빼앗을 때도, 알고리즘이 인간의 목소리를 흉내 낼 때도, 이 선언은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두 회칙이 135년의 간격을 넘어 함께 증언하는 것은 이것이다. 기술의 시대에도,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다. 135년의 메아리는 오늘도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