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롤드 로저스 쿠팡 한국 임시대표가 지난 2월 6일 국회 '쿠팡 사태 연석 청문회'에서 허위 증언을 한 혐의(국회증언감정법상 위증) 관련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마포구 서울경찰청 반부패수사대에 출석하고 있다.연합뉴스
미국 연방 하원 법제사법위원회가 한국 정부가 쿠팡 등 미국 기업을 차별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공개하자 정부가 2일 전방위 반박에 나섰다. 외교부는 “쿠팡 측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반영했다”며 공식 유감을 표명했고, 국가정보원도 보고서에 담긴 ‘국정원 주도 쿠팡 측 IT 장비 회수’ 의혹을 “명백한 허위”라고 일축했다. 미 의회는 행정부의 성향 변화와 무관하게 항상 한·미 동맹을 지지해온 든든한 우군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우리 외교당국과 정보기관이 동시에 직접적으로 유감을 표한 건 매우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박일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정부는 그동안 미 법사위 측과 소통하면서 우리 입장을 충실하게 설명해 왔다”며 “법사위 보고서는 쿠팡 측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미 하원 법사위 공화당 지도부가 지난 1일(현지시간) 공개한 보고서는 한국 정부가 미국 기업을 상대로 “징벌적 의무”, “차별적 법 집행 관행”을 적용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쿠팡 사건을 집중 조명하면서 한국 정부가 “괴롭힘 캠페인”을 벌였고, 전 직원의 고객정보 무단 접근 사건 이후 이를 “정부 차원의 쿠팡 공격”으로 확대했다고 적었다.
이에 대해 박 대변인은 “정부가 쿠팡에 대해 차별적인 조사와 부당한 규제를 지속하고 있다는 보고서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쿠팡에 대한 조사 및 조치는 우리 국내법에 따라 적법하고 비차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며 “정부는 국적과 관계없이 공정한 기업 활동 환경을 보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박일 외교부 대변인이 2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외교부에서 열린 정례브리핑에서 질문받고 있다. 박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미 하원 법사위의 한국의 미국기업에 대한 차별보고서는 쿠팡 측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특히 이번 보고서에는 그간 정부와 쿠팡 측의 주장이 엇갈렸던 ‘국정원 개입’ 의혹도 자세히 담겼다. 보고서는 국정원이 쿠팡 해킹 피의자의 전자기기와 진술서를 회수하도록 쿠팡 측에 지시했고,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도 쿠팡에 국정원과 긴밀히 협력하라고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또 쿠팡 측이 중국에서 데스크톱 PC와 하드드라이브를 확보했다고 알리자, 이 고위 관계자가 “이재명 대통령에게 보고하겠다”고 답한 뒤 실제로 보고한 사실을 확인해줬다는 대목도 포함됐다. 이는 쿠팡의 자체 조사를 지시한 적 없다는 기존 국정원 입장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에 대해 국정원은 이날 별도 입장을 내고 “유출자가 중국으로 도피하여 보관하던 IT 장비 회수를 국정원이 주도했다는 쿠팡 측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국정원은 “다른 정부기관을 통해 ‘중국인 유출자의 IT 장비를 확보했으니 국내로 이송할 수 있도록 지원해달라’는 쿠팡 측의 요청을 전달받기 전까지는 쿠팡과 업무협의를 진행했던 실무 직원은 물론 어느 누구도 IT 장비의 존재와 쿠팡 측의 확보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밝혔다.
이어 “쿠팡 측이 다른 정부기관을 통해 국내로의 장비 이송을 먼저 요청했다”며 “유출자가 하천에 유기한 노트북 등에 우리 국민 3300여만 명의 개인정보가 저장돼 있을 수 있다는 판단하에 해당 장비가 유실·탈취되지 않도록 안전하게 국내 이송을 지원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또 “쿠팡 측의 일방적인 허위 주장에 유감을 표한다”고 강조했다.
외교부는 이번 보고서를 미 하원 법사위의 중간 실무보고서 성격으로 보고 있다. 해당 보고서는 지난 2월 23일 하원 법사위가 쿠팡 측 비공개 진술을 청취한 뒤 약 4개월여 만에 나왔다. 정부는 향후 추가 보고서가 공개되거나 관련 청문회가 열릴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 미 하원 법사위는 한국 정부의 입장도 청취할 준비가 돼 있다는 뜻을 외교부에 전달했다고 한다.
박 대변인은 “정부는 앞으로도 법사위를 비롯한 미 의회 및 행정부를 지속 접촉하여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겠다”며 “우리 정부가 미국 디지털 기업을 비차별적으로 대우한다는 한·미 정상회담 결과물인 공동 설명 자료(조인트 팩트 시트) 상의 약속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음을 적극 설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정부가 미 의회에 직접적으로 유감을 표하는 건 매우 드문 일이다. 지난 2007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자동차 협상 당시 미 의원들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한국 측에 불리한 내용을 담은 서한을 보내자 외교통상부는 “이번 서한은 자유무역의 근본정신을 훼손하고 있다”며 “매우 유감”이라고 밝혔다.
한 소식통은 “이례적이지만, 보고서에 일방적인 주장이 지나치게 많이 담겨 있어 정부로서도 유감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외교가에선 이번 보고서를 계기로 쿠팡 사안이 다시 한·미 정상 간 안보 분야 합의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당초 후속 안보 협의는 올해 초부터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쿠팡 이슈가 뇌관으로 작용해 지난달 초에야 첫 회의를 열었다. 이에 대해 외교부 관계자는 “한·미 안보 협의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관리할 것”이라며 “늦어도 이달 중 2차 한·미 안보 협의가 열릴 수 있도록 조율 중”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안보 분야 합의의 핵심인 핵추진잠수함(원잠) 도입이나 한국의 원자력 권한 확대는 물론 이재명 정부가 주력하는 전시작전통제권 조기 전환까지 모두 미 의회가 상당한 권한을 행사하는 사안이다. 이번 보고서는 하원 법사위 차원에서 나왔지만, 미 의회 내에서 한국이 쿠팡을 비롯한 미국 기업을 차별한다는 인식이 확산할 경우 다양한 동맹 현안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