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 개봉한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뒤늦게 본 바로 다음날이었다. 옆자리 동료가 매일 야근하며 개막을 준비 중인 전시장에 들어가 보고 남몰래 깜짝 놀랐다. 전시 공간 여기저기에 돌이 나와 있었다. 체중계 위에 올라가 있는 돌, 정지용의 시를 배우고 있는 돌, 그리고 마치 떼창을 하는 군중처럼 하나의 마이크 주변으로 둥글게 모여 있는 수십 개의 돌들.
오사카에서 태어나 원폭 피해 귀국
초2 때 6·25, 전차 등 전쟁 풍경 그려
30대 초반 백남준 접하고 방향 전환
간절한 소망 담은 돌, 평생의 오브제
제자리뛰기 탈진 퍼포먼스 등 유명
죽기 몇 시간 전까지도 행사 걱정
박현기, ‘무제’, 1983.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전시 중이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프로젝트 헤일메리’에는 돌처럼 생긴 외계 생명체 ‘로키’가 나온다. 라이언 고슬링이 분한 주인공과 우주에서 만나 서로 둘도 없는 친구가 되는 존재이다. 영화 속에서 로키가 자신을 희생해 친구를 구하고 돌무덤처럼 쓰러져 있을 때 속으로 울컥한 사람이라면 이 전시를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꽤 귀여운 구석이 있는 돌들이 등장한다. 전시의 제목은 ‘이것은 개념미술이 (아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2주 전에 개막했다.
김범, ‘정지용의 시를 배운 돌’, 2010. 국립현대미술관 ‘이것은 개념미술이 (아니)다’ 전시 출품작이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언급한 작품들은 각각 곽인식·김범 그리고 박현기의 작품들이다. 이 중에서도 돌을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한 인물은 박현기이다. 조각의 재료로 썼다는 얘기는 아니다. 박현기는 돌에 나름의 존재감을 부여하고 때로는 의인화하기도 했다.
박현기는 백남준과 함께 한국 미디어 아트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 국제무대에서 화려하게 활약한 백남준과는 여러모로 대비되는, 이른바 국내파이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서구의 첨단 기술을 이용한 백남준과는 완전히 반대 지점에서 출발했다.
박현기는 1942년, 오사카의 가난한 한국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세 살이 되던 해, 미국이 곧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해지자 가족들은 한국으로 도망쳐 대구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뛰어나고 미술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차·군함·비행기 등 전쟁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때는 미술부 활동을 하며 각종 미술대회에서 수상했다. 자연스레 예술가의 꿈을 품고 홍익대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인테리어 생업 틈틈이 작업 그런데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서울에서의 대학생활이 쉽지 않았다. 그는 인테리어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를 벌어야 했고, 이를 계기로 대학 3학년 때 건축과로 전과했다. 당시 홍익대에 출강 중이던 유명 건축가 김수근의 영향도 있었지만, 졸업 후 생계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현실적 부담감도 작용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고향 대구로 돌아가 인테리어 사업체를 운영했다. 현실적인 선택을 했지만 예술에 대한 열정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돈을 벌면 곧바로 작품을 만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전시에 참여했다.
1974년, 나이 서른두 살의 박현기는 백남준의 비디오 작품을 처음으로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전까지 평면과 설치를 주로 만들던 그는 이때부터 비디오 작업에 관심을 가졌다. 박현기보다 열 살이 많았던 백남준은 당시 이미 전 세계를 무대 삼아 비디오 아트 거장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백남준이 선진국의 첨단 기술을 활용한 화려한 작업을 펼쳐냈다면, 박현기는 훨씬 더 소박하고 토속적인 작품들을 만들었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정적이고 명상적인 성격을 띠었다. 이는 주어진 환경조건 때문이기도 하지만, 박현기가 한국의 전통문화에 심취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박현기는 학교에서 받은 교육이 서양으로부터 억지로 이식된 것이라는 자각이 있었다. 그래서 대학 시절에는 방학마다 대구 남평 문씨의 원로 학자를 찾아가 강론을 들었고, 귀향 후에는 시골의 향교와 사찰을 찾아다니며 선조들의 미의식을 탐구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들은 새로운 전위미술의 형식에 동양의 자연관과 미학이 결합된 독특한 분위기를 띠었다.
전위의 최전선, 대구현대미술제 이끌어 1970년대의 대구는 서울을 능가하는 한국 전위 미술의 중심지였다. 고향에서 건축가로 자리 잡은 박현기는 이강소·최병소 등과 함께 당시 전위 미술의 최전선이었던 대구현대미술제를 이끌었으며 실험적인 작품들을 연달아 발표했다.
박현기, ‘무제(반영)’, 1979. 낙동강에 거울을 세워둔 후 거울 속에 반영된 물결의 움직임과 실제 수면을 함께 비디오에 담았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그의 첫 영상 작품은 물에 비친 사물의 모습을 촬영한 ‘반영’ 시리즈였다. 특히 낙동강에 거울을 수직으로 세워 물결이 거울에 비치게 만든 후 실제 수면과 거울에 비친 장면을 함께 비디오에 담은 작품은 큰 주목을 받았다.
박현기, ‘무제(TV 돌탑)’, 1979.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1979년과 80년에는 상파울루 비엔날레와 파리 비엔날레에 연달아 초대되었다. 이때 출품한 ‘무제(TV 돌탑)’는 그의 대표작으로 남았다. 한국의 전통적인 돌탑 쌓기 형식을 빌려, 실제 돌과 화면에 돌이 등장하는 TV 수상기를 겹쳐서 쌓아 올린 설치 작품이었다.
이 작품에는 사연이 있다.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초등학교 시절, 대구의 무태 고개를 넘는 피난민 행렬 속에서 어린 박현기는 신기한 장면을 목격했다.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며 “돌 주워라”라는 말을 릴레이식으로 전달하고, 저마다 조그마한 돌을 준비해 들고 돌무더기에 정성스럽게 올려놓고 가는 것이었다.
바닥에 나뒹굴던 평범한 돌 하나가 인간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소중한 존재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 기억의 강렬함 때문인지, 돌은 그에게 평생 특별한 오브제였다. 특히 서구식 교육이 ‘미신타파’라는 말로 배척하려 한 우리의 민간 신앙과 관련된다는 점이 그에게는 오히려 매혹적이었다.
“돌이란 태고의 시간과 공간을 포용하는 자연이다. 돌 작업은 자신을 표현하고 서구과학의 한계를 느낀 우리 입장과 나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수십 개의 돌 사이 나체 퍼포먼스
박현기, ‘무제’. 1983년 대구 수화랑 개인전 퍼포먼스 장면.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런 그의 생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1983년 대구 수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이다.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장에 재현된 것이 바로 당시의 설치 장면이다. 이때 박현기는 수십 개의 돌을 전시장 바닥에 늘어놓고 그 사이를 나체로 돌아다니는 퍼포먼스를 행했다. 등에는 ‘I am not a stone(나는 돌이 아니다)’, 가슴에는 ‘Stone and so forth(돌 그리고 기타 등등)’라고 적은 채 돌을 들거나 그 위에 앉는 등의 행위였다. 자신의 몸을 통해 돌과 인간 사이의 경계를 잠시나마 흩뜨리는 작품이었다.
한편 돌들이 깔려 있는 전시장 한쪽에는 스피커가 놓여 있었고 천장에는 마이크가 매달려 있었다. 스피커에서는 길에서 녹음한 거리의 소음이 흘러나왔고, 마이크에서는 당시 갤러리의 나무 바닥을 밟는 관람객의 발소리가 증폭돼 전시장에 울려 퍼졌다. 이 소리를 마치 돌들이 듣고 있는 것처럼 돌 하나에 헤드폰을 씌워 놓기도 했다. 결국 박현기에게 돌은 자연이자 자연이 되고 싶은 자기 자신이기도 하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을 귀 기울여 듣고 내면화하는 존재이기도 했던 것 같다.
박현기, ‘무제’, 1980. 작가가 제자리에서 뛰는 모습을 담은 2분47초짜리 영상이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상설전에서 전시 중이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박현기는 독특한 퍼포먼스로도 유명한데, 필자는 제자리뛰기 퍼포먼스를 기록한 영상을 가장 좋아한다. 작가가 똑바로 서서 위아래로 뛰는 동작을 반복하는 지극히 단순한 영상이다. 두발로 땅을 힘껏 구르면서 시작되지만 2분 47초 만에 탈진 상태가 되어 주저앉는 모습으로 허무하게 끝난다. 그런데 무의미한 제자리뛰기를 하다가 점차 힘이 빠져나가는 과정이 묘하게 감동적이다.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두 주인공은 각자의 행성을 구해야 한다는 미션을 가지고 우주에 내던져진 존재들이다. 사실 우리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떤 상황 속에 던져지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연달아 발생한다. 기력이 다할 때까지 평생 제자리뛰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박현기에 대한 여러 기록을 읽어보면 그는 참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57세에 갑작스레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프랑스 니스 시립미술관 초대전과 광주 비엔날레 기획 준비로 바쁜 와중이었다. 그런데도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면서 모든 회의에 참석하고, 세상을 떠나기 몇 시간 전까지도 자신이 기획위원을 맡은 행사를 걱정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들에서는 분명 삶의 허무와 무의미에 대한 관조가 느껴진다. 그럼에도 예술에 그토록 열정을 바친 원동력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뭐라도 하지 않으면, 삶이 무의미 속에 침잠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삶의 허무를 견딜 수 없어서 무엇이든 만들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몸부림이었을까?
이렇게 공허한 질문들을 떠올리다 보니 작품 속 돌들이 조금 달라 보인다. 말없이 단단하고 무거운 돌들은 왠지 현답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어리석은 질문은 무심하게 넘기는 담대함이 있을 것 같다. 적어도 답이 없는 문제들로 스스로를 괴롭히거나 무의미한 제자리뛰기를 하며 소진되지는 않을 것 같다. 어쩌면 그래서 박현기도 자꾸 돌을 썼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