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전남광주통합특별시에서 열린 서남권 국민보고회의 가장 인상적인 참석자는 이근배 전남대 총장이었다. 800조원 규모의 ‘호남 반도체’ 소식에 그는 기뻐서 밤잠을 설쳤다며 “이제 우리 지역 청년들이 고향을 떠나지 않아도 일자리를 찾고 뿌리내리며 살 수 있겠단 희망이 생겼다”고 연신 감사를 표했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지난해 광주광역시의 청년(19~34세) 순유출 인구 비율(2.5%)은 7대 특광역시 중 1위, 청년 고용률(49.9%)은 전국 17개 시·도 중 꼴찌다.
매년 5월 혹은 선거철에나 소환되는 도시, ‘전라디언’이라는 멸칭과 함께 혐오 대상이 되기 일쑤인 곳, 민주주의의 성지라지만 근로임금 수준은 전국 평균의 92%(2025년 292만6800원)에 그치는 광주가 반도체 투자 세례를 맞았다. 들뜬 지역 분위기와 달리 광주 밖에선 반론이 거세다. ‘왜 꼭 거기여야 하느냐’고. 이날 행사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경제적 원리에 따른 기업의 판단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그간 차별과 설움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지켜온 호남에 대한 역사적 보상”이라고 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광주에서 열린 서남권 첨단산업 발전 비전 국민보고회를 마친 뒤 서남권 산업단지 후보지를 항공 시찰하고 있다. 뉴스1
여당 전당대회 때문이든, 지역 균형발전에 대한 대통령의 의지 때문이든 호남 반도체의 배경은 정치적이다. 하지만 국가 주도 산업정책이 정치적이지 않은 때가 있었던가.
대일청구권자금을 종잣돈 삼아 ‘영일만의 기적’을 만든 포항제철소, 부산·울산·경남에서 굴지의 주요 대기업이 집중 탄생한 배경 등을 살펴보면 한국의 지역 격차는 한국전쟁 이후 주류 정치 엘리트의 정치적 선택이 쌓이고 쌓인 결과다. 정권의 정책 의지와 무관한 진공 상태에서 기업 활동이 이뤄진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주어진 환경에서 최대공약수를 찾아내는 게 기업이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모두 향후 시장 상황에 맞게 투자 속도나 규모를 조절할 가능성이 있다.
지금 주목해야 할 건, 호남 반도체의 정치성보다도 광주의 실력이다. 일각에서 지적하는 용수·전력 문제보다 인재 유치, 즉 광주의 정주 여건 조성 역량에서 이 투자의 성패가 판가름날 수 있다. ‘경기도 평택이 반도체 구인 남방한계선’이라는 냉소에 광주는 답해야 한다. 수백조원 투자를 받을 광주는 남방한계선을 어떻게 뚫을 것인가.
인재를 끌어당기는 도시의 핵심 요소는 교육과 병원, 그리고 문화다. 일자리가 있어야 사람이 오고, 살 만해야 고부가가치 서비스 산업이 발달하며 다시 인구가 는다. 이 뫼비우스의 띠가 선순환할지, 악순환할지는 지방 정부에 달렸다.
안타깝게도 이제까지의 광주는 이 지점에서 취약했다. 이번 6·3 지방선거 때 한국예술종합학교를 광주로 이전시키겠다고 했던 민형배(현 시장) 후보의 공약이 단적인 예다. 광주는 노무현 정부 때 7000억원을 지원받아 거대한 건축물(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지었지만, 개관 10년이 넘도록 그 안팎을 채울 예술가와 문화산업 생태계를 키우지 못했다. 수도권으로 모든 자원이 빨려들어간 마당에 광주라고 별 수 있겠나 싶지만, 이 공약의 문제는 그 게으름과 행정 편의주의적 발상에 있다. 서울에서 한예종을 떼어와 간단히 해결하려 한 방식 말이다.
지난달 29일 민형배 전남광주통합특별시장 당선인(현 시장)이 전남 나주시 전남광주대전환기획위원회 대회의실에서 삼성전자 반도체부문 사장 출신인 정은승(왼쪽) 전남광주대전환기획위원장과 함께 '3대 메가 프로젝트 국민 보고회'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물론 광주의 잘못만은 아니다. 고도 성장기에 산업화에서 배제됐고, 지역 출신 기업가도 적다 보니 광주엔 양질의 제조업 일자리가 적고 중산층도 얇다. 치열한 경쟁 없이 민주당 공천을 받으면 무조건 당선되는 도시에서 경쟁력 있는 행정가가 길러지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지역 토건 세력과 행정이 얽히고설킨 구조가 어떻게 광주를 좀먹어 왔는지는 조귀동 작가의 『전라디언의 굴레』에 잘 나와 있다.
그러나 이제는 광주가 중앙정부의 시혜적 지원이 아닌 스스로의 실력으로 도시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도시의 인프라와 소프트웨어를 설계하고 운영할 행정 역량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민형배 시장의 광주가 그런 준비가 돼 있는지 5000만 명이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