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국채 토큰화’ 구상을 내놓는 등 디지털 화폐 생태계 설계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민간 스테이블코인(특정 법정화폐나 자산에 가치를 연결한 암호화폐)이 가진 한계를 중앙은행이 보완하면서, 미래 화폐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신현송 한은 총재는 지난 1일(현지시간) 포르투갈에서 열린 ‘ECB 중앙은행 포럼’에 참석해 중앙은행이 주도하는 ‘통합원장(unified ledger)’을 미래 화폐 청사진으로 제시했다. 이는 중앙은행이 구축한 블록체인 네트워크 안에서 중앙은행 화폐와 은행 예금, 국채 등 자산이 토큰화돼 공존하는 환경을 뜻한다.
통합원장 구조. 자료 BIS·한국은행
그는 ‘왜 중앙은행이 중심이 돼야 하는가’하는 질문에 대해선 민간 스테이블코인이 가진 태생적 한계를 들었다. 민간 스테이블코인은 발행사의 사정에 따라 가치가 출렁일 수 있다. 민간 스테이블코인이 널리 쓰일 수록 기존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영향력도 약화해, 시장금리 변동성이 커질 위험이 있다. 반면 중앙은행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발행된 ‘예금 토큰’은 은행 간 정산이 중앙은행 돈으로 이뤄지는 만큼 화폐 단일성이 보존된다.
민간 스테이블코인의 거래 비용이 예금토큰보다 오히려 더 비쌀 것이란 전망도 있다. 한국의 경우,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발행돼 오프라인 결제에 쓰이려면 기존에 구축된 카드 결제망이 이용될 가능성이 크다. 이 때 카드사 수수료가 발생하기 때문에, 거래 비용이 기존 통화보다 대폭 절감되긴 현실적으로 어렵다.
탈중앙화된 블록체인의 안전성을 담보하는 과정에서도 비용 상승이 불가피하다. 신 총재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탈중앙화된 블록체인은 검증 참여자들에게 끊임없이 보상을 줘야 하고, 더 엄격하게 검증해 안전성을 높일수록 비용과 수수료가 치솟게 된다”고 짚었다.
한은이 ‘프로젝트 한강’에서 CBDC(중앙은행 발행 디지털화폐)와 예금토큰의 존재 이유를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예금토큰의 경우결제 비용 절감 측면에서 민간 스테이블코인보다 우위를 가질 수 있는 데다, 중앙은행의 안정적인 시스템도 누릴 수 있다는 의미다.
민간 스테이블코인이 강조하는 여러 편의성 역시 예금토큰이 중앙은행 플랫폼 아래에서 똑같이 구현할 수 있다고 한은은 강조한다. ‘프로그래밍 기능’, 즉 결제 조건을 미리 설정하는 기능이 대표적이다. 해외 송금 역시 민간 스테이블코인을 이용하지 않아도 충분히 빠르게 실현될 수 있다는 게 한은 입장이다. 주요국과 공동 수행하고 있는 ‘아고라 프로젝트(국가 간 지급결제 개선 프로젝트)’에 각국 예금토큰을 연계하면, 국가 간 송금이 빠르고 편리해질 뿐 아니라 원화의 국제적 활용도 역시 높아질 수 있다고 한은은 밝혔다.
다만 부동산이나 미술품 등 현실 자산을 블록체인 시스템으로 가져오는 실물연계자산(Real World Asset, RWA) 토큰화 시장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 블록체인 상에서 토큰화된 자산과 스테이블코인 간 전환이 효율적으로 이뤄지면서, 스테이블코인은 이미 RWA 시장의 주요 결제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가 1일(현지시간) 포르투갈 신트라에서 열린 '유럽중앙은행(ECB) 중앙은행 포럼' 세션에서 발표하고 있다. 사진 ECB
그러자 한은은 ‘국채 토큰화’ 구상을 내놓으면서, 중앙은행이 주도하는 ‘통합원장’에서도 토큰화된 자산이 한 축을 차지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나섰다. 이날 신 총재는 “통합원장의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국채 등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자산을 토큰화하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며 “국채를 디지털 화폐 시스템에서 직접 발행·유통하면 통화정책 집행의 대응력을 높이고 금융시스템 안정에 기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중앙은행과 민간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미래 화폐 생태계 주도권을 두고 다투고 있지만, 이들이 공통적으로 그리는 화폐제도의 미래는 결국 ‘토큰화’다. 한은 관계자는 “AI 에이전트(인공지능 기술이 사용자를 대신해 스스로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시스템)가 도입돼 금융·투자·소비 등이 이뤄지면 자산 토큰화는 불가피한 변화의 흐름”이라며 “중앙은행의 신뢰와 토큰화의 장점이 함께 작동할 수 있도록 미래 화폐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