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활자는 두 번 줄어들고 한 번 커집니다. 그 계산을 못 하면 활자는 절대 만들 수 없습니다."
국가무형유산 임인호 금속활자장이 거푸집에서 꺼낸 활자를 확인하고 있다.
충북 청주시 금속활자전수교육관 작업장. 한쪽에서는 1200도의 벌건 쇳물이 담긴 도가니에서 희뿌연 연기가 피어오르고, 뜨거운 열기가 실내를 가득 메웠다. 국가무형유산 금속활자장 보유자 임인호 장인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쇳물을 거푸집의 주탕구에 조심스럽게 부었다. 온 신경을 손끝에 집중한 채 이어진 작업. 한순간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긴장감 속에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임인호 장인이 활자의 원본이 되는 틀인 나무 어미자를 만들고 있다.
임인호 장인이 주물사 거푸집에 나무 어미자를 정교하게 배치하고 있다.
임 장인은 이날 전통 '주물사주조법'으로 금속활자를 만드는 과정을 시연했다. 갯벌에서 채취한 고운 모래로 거푸집을 만든 뒤 그 안에 1200도의 쇳물을 부어 활자를 빚어내는 방식이다. 그는 "주물사의 입자가 균일해야 글자의 획 하나까지 정교하게 살아난다"며 "인천 갯벌의 뻘은 입자가 곱고 밀도가 높아 섬세한 활자를 제작하는 데 최적의 재료"라고 말했다.
입자가 고운 주물사를 체로 곱게 내려 어미자 위를 고르게 덮고 있다. 금속활자 제작에는 내륙 모래보다 입자가 균일한 갯벌의 뻘(주물사)을 사용한다.
임 장인은 '계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금속활자 제작의 핵심은 '두 번의 축소와 한 번의 확대'라는 과학적 원리에 있다. 20~30년 이상 자연 건조한 산벚나무나 박달나무에 글자를 새긴 '어미자'는 건조 과정에서 한 차례 수축한다. 이후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 만든 활자 역시 식으면서 다시 한번 크기가 줄어든다. 반면 마지막 연마 과정에서는 활자 윗면이 약 85도의 미세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숫돌에 갈아낼수록 글자의 획이 오히려 넓어진다.
임인호 장인이 주물사로 거푸집을 채우고 있다.
장인은 이와 같은 수축과 확장의 변화를 머릿속으로 계산해 처음 나무를 깎는 단계에서부터 완성될 활자의 크기를 정확히 역산해 낸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를 하나하나 계산해 완성된 활자를 만들어내는 이 과정 자체가 금속활자 제작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말했다.
주물사를 채운 거푸집에 어미자의 글자 문양이 선명하게 찍혀 있고, 쇳물이 흘러드는 통로인 가지쇠가 연결돼 있다. 나뭇가지처럼 여러 갈래로 뻗어 있어 '가지쇠'라는 이름이 붙었다.
임 장인은 "글자마다 획의 굵기와 모양이 달라 계산법도 모두 다르다"며 "아주 미세한 오차가 생겨도 획이 붙거나 글자가 무너져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활자 하나가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최소 세 차례에서 다섯 차례까지 혹독한 교정 과정을 거치며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활자를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첫 단계인 나무 어미자를 새기는 작업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임인호 장인이 활자의 원본이 되는 틀인 어미자를 만들고 있다. 그는 20~30년 이상 자연 건조한 산벚나무로 어미자를 만든다.
주조 공정은 정교하게 진행된다. 나무 어미자를 주물사에 눌러 찍어 거푸집을 만든 뒤 위아래 틀이 달라붙지 않도록 분리제를 뿌린다. 이어 쇳물이 흘러 들어갈 통로인 '가지쇠'를 길게 내고 거푸집을 단단히 맞물린 뒤 쇳물을 붓는다. 식은 활자는 마치 나뭇가지에 열매가 달린 것처럼 연결되어 나오는데 이를 하나씩 잘라내 숫돌에 갈아가며 높이와 수평을 맞춘다. 비로소 완성된 활자들을 판에 짜 맞추고 유성먹을 묻히면 인쇄 준비가 끝난다.
임인호 장인이 1200℃ 이상의 고온에서 녹인 쇳물을 거푸집에 붓고 있다. 쇳물 주입구(주탕도)로 들어온 쇳물은 가지쇠를 따라 각 활자의 거푸집으로 고르게 흘러간다.
임인호 장인이 1200℃ 이상의 고온에서 녹인 쇳물을 거푸집에 넣고 있다.
그는 이제 온도계 없이도 피어오르는 연기의 색만으로 쇳물의 온도를 가늠하고, 쇳물을 붓는 찰나의 순간 성공 여부를 직감한다고 했다. 수십 년간 축적된 경험과 수없이 반복한 손끝의 기억이 장인만의 감각으로 이어진 것이다.
임인호 장인이 주물사주조법을 통해 만든 활자를 거푸집에서 꺼내 솔로 다듬고 있다. 주물사주조법은 나무에 글자를 새긴 어미자를 주물사에 넣고 거푸집을 만들어 그 사이에 쇳물을 부어 활자를 만드는 방식이다.
임인호 장인이 거푸집에서 꺼낸 활자를 확인하고 있다.
이 고된 작업을 묵묵히 이어가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장인은 주저 없이 '성취감'과 '아름다움'을 꼽았다. 그는 "쇳물을 붓고 완벽한 활자가 뽑혀 나왔을 때의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며 "어미자를 들어 올린 뒤 모래 위에 선명하게 남은 글씨 자국은 세상 그 어떤 꽃보다 아름답다. 그 순간의 감동이 지금까지 저를 버티게 한 가장 큰 힘"이라고 말했다. 오랜 세월 외길을 걸어온 장인의 눈빛에는 자신의 일에 대한 깊은 애정과 자부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임인호 장인이 주물사주조법을 통해 만든 활자를 거푸집에서 꺼내 솔로 다듬고 있다.
1984년 목공예로 처음 일을 시작한 임 장인은 1996년 스승을 만나며 본격적인 금속활자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전수교육생과 이수자 과정을 거쳐 기술을 연마한 그는 2009년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 금속활자장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현재는 청주 금속활자전수교육관과 괴산 작업실을 오가며 전통 기술의 맥을 잇고 있다.
주물사주조법으로 만든 금속활자. 이렇게 만들어진 금속활자는 단순한 인쇄 기술을 넘어 우리나라의 과학기술과 문화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인 '직지(직지심체요절)'의 금속활자를 완벽하게 복원해 낸 것이다. 임 장인은 2011년부터 5년간의 연구와 실험 끝에, 인쇄본으로만 전해지던 '직지' 상·하권의 금속활자 구성을 온전히 재현해 냈다.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된 직지는 독일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1455년)'보다 무려 78년이나 앞선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다.
임인호 장인이 금속활자를 조합해 만든 활자판에 유성먹을 바른 뒤 한지를 덮고 인출대로 문질러 인쇄하고 있다.
이제 장인의 시선은 과거를 넘어 미래로 향하고 있다. 그는 전통 재료를 고수하면서도 작업 효율을 높일 수 있는 신소재를 연구하는 한편 금속활자를 현대인들이 일상에서 쓸 수 있는 문화 상품으로 발전시키는 방법을 고민 중이다.
금속활자를 조합해 만든 활자판에 유성먹을 바른 뒤 한지를 덮고 인출대로 문질러 인쇄하고 있다.
임 장인은 "기술만 박물관에 남아서는 온전한 계승이라 할 수 없다"라며 "현대인들이 실제로 찾고, 즐기고, 사용하는 '문화'가 되어야만 비로소 다음 세대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주물사주조법으로 만든 금속활자. 가지쇠에 달린 활자를 하나씩 떼어내 다듬으면 각각의 의미를 갖는 금속활자가 된다.
600여 년 전 세계 인쇄 역사의 정점을 찍었던 우리의 전통 기술. 오늘도 장인의 굳은살 박인 손끝에서 과거의 유산을 복원하는 것을 넘어 미래를 향한 새로운 가능성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