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1일 청와대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과 함께 오찬을 위해 상춘재로 이동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전 대통령은 지난 1일 이재명 대통령과의 오찬 회동에서 북한에 대한 ‘인내’와 ‘대화’를 다시 주문했다. 이에 외교가에선 문 전 대통령 재임 시절 이 두 가지를 앞세웠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명암이 다시 회자하고 있다.
문 전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 상춘재에서 이 대통령을 만나 “우리 정부가 지금처럼 인내하면서 계속해서 대화의 문을 두드리고, 상황을 안정적으로 잘 관리해 나간다면 언젠가는 다시 대화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리라고 믿는다”며 대북 접근법을 조언했다.
그러자 이 대통령도 “적대감, 대결 의식이 우리가 한두 해 정성 들이고 입장 바꾸고 해서 해결될 수 없는 상황인 것 같다”고 진단하면서도 “민주정부들이 해왔던 햇볕정책부터 시작해서 남북 평화 공존 정책은 끊임없이 해야 한다”며 “그것도 잘 이어가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문 전 대통령은 자신이 추진했던 대화 기조의 유효성을 재차 강조했고, 이 대통령은 이를 ‘평화 공존 정책 계승’으로 받아안은 셈이다.
다만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에는 최초의 남·북·미 간 연쇄 정상회담이라는 역사적 성과를 이뤘으나 비핵화 측면에서는 실질적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평가가 따라붙는다. 문 전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세 차례 남북 정상회담을 열고 북·미 대화의 중재자를 자처했다. 하지만 실제 협상 국면에선 북한이 문재인 정부를 충분히 존중하지 않았다는 정황이 잇따라 포착됐다.
2019년 6월 30일 진행된 남북미 판문점 회동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문재인 대통령(가운데),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 김정은 위원장. 노동신문
대표적인 장면은 2019년 6월 판문점 남·북·미 회동이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은 판문점에서 전격 회동했다. 문 전 대통령도 현장에 있었고, 세 정상의 만남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상징적 장면으로 기록됐다. 그러나 이후 공개된 미국 측 회고록들은 전한 이면은 조금 달랐다.
마이크 폼페이오 전 미 국무장관은 2023년 발간한 회고록 『한 치도 물러서지 말라』에서 당시 문 전 대통령이 판문점 북·미 정상 만남에 함께 하려 여러 차례 직접 전화했다고 썼다. 하지만 폼페이오가 준비한 답변은 “김정은은 트럼프 대통령과 단둘이 만나기를 선호한다”는 취지였다고 한다. 폼페이오는 회고록에서 “문 대통령은 불쾌해했지만, 김정은은 문 대통령을 위한 시간도, 존중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옳은 결정을 했다”는 취지로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도 비슷하다. 볼턴은 2020년 발간한 『그 일이 일어난 방』에서 2019년 판문점 회동을 앞두고 “트럼프는 문 대통령이 주변에 없기를 원했고, 김정은도 문 대통령이 주변에 있기를 원치 않는 게 확실했다”고 썼다. 문 전 대통령이 김정은을 맞이한 뒤 트럼프 대통령에게 인계하고 떠나는 방식 등을 제안했지만, 북·미 양측 모두 사실상 양자 회동을 원했다는 게 볼턴의 설명이다.
이와 관련, 김정은은 2018년 9월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도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문 전 대통령이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과 직접 논의하고 싶다는 취지로 적었다. 문 전 대통령의 관여에 대해서는 “과도한 관심은 불필요하다”는 표현도 담겼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문재인 정부 인사들의 기억은 다르다. 당시 회동 성사에 깊숙이 관여한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19년 6월 판문점 회동 당시)문 대통령의 방문은 북한 측의 김창선 국무위원회 부장이 ‘동의한다’고 답을 줘서 진행된 것”이라며 “이는 미국 측도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김창선은 김정은의 집사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더중앙 플러스 ‘김정은 연구’ 보도〉
볼턴은 문재인 정부 자체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회고록에서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뒤 정의용 당시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영변 핵시설 폐기가 북한 비핵화의 비가역적 단계로 들어가는 매우 의미 있는 첫걸음”이라는 문 전 대통령의 생각을 전하자, 이를 “문재인의 조현병적 아이디어”라고 표현했다. 영변 일부 폐기를 비핵화 진전으로 해석하려던 한국 정부의 접근을 안일하다고 비판한 것인데, 그렇다 해도 동맹국 지도자에 대해 이런 표현을 쓰는 건 심각한 외교적 결례에 해당한다.
이처럼 엇갈리는 양측의 기억이 모두 맞는다면, 결국 이는 김정은이 미국과 남한에 각기 다른 말을 하며 본인에 유리한 방향으로 상대를 움직이려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북한은 지난 202년 6월 개성의 남북 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고 사진을 공개했다. 연합뉴스
하지만 어느 순간 남 측에 대해서는 기대를 접은 듯, 북한의 대남 태도는 점차 거칠어졌다. 북한은 2019년 8월 문 전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를 두고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이라고 비난했다. 문 전 대통령이 “평화경제”를 언급하며 남북 협력의 미래를 말한 직후였다. 다음해 6월 북한은 2018년 남북 정상회담의 결과물인 개성 남북공동 연락 사무소를 폭파했다. 남북 간 상시 소통 채널이 순식간에 폭파된 건 문재인 정부 평화 프로세스의 한계를 단적으로 내보인 장면으로 남았다.
결국 그 시절 한반도에서 극적 성사했던 정상 간 대화 이면엔 제각각의 계산이 맞물렸단 지적이 나온다. 문재인 정부는 남북 화해를 동력으로 북·미 비핵화 협상을 견인할 수 있다고 봤다. 하지만 트럼프는 김정은과 톱다운 회담을 통해 외교적 성과를 과시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고, 김정은은 체제 보장을 위해 미국 대통령과 흥정하길 원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 대통령의 중재 역할은 당시의 체감보다 매우 제한적이었단 평가가 외교가에선 지배적인 이유다.
이 대통령이 지난해 8월 첫 한·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에게 “한반도의 피스메이커” 역할을 요청하며 자신은 “페이스메이커”가 되겠다고 한 것도 이런 현실 맥락과 무관치 않단 해석이다.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운전자론’과 달리, 북·미 대화의 주도권은 미국에 두고 한국의 비중치는 크게 낮춘 발언이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인사들이 문재인 정부의 대북 기조에 회의적 시각을 갖고 있었던 점을 고려할 때 실용적인 접근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익명을 원한 소식통은 “문재인 정부 시절에도 대화 재개를 위한 인내와 중재 노력이 결국 북한의 호응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며 “상대의 전략적 계산이 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대화 기조만 반복할 경우, 다시 비슷한 한계에 부딪힐 수 있다”고 지적했다.